새전북신문

[금요수필]가을 나들이

김형중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11월 14일 13시54분

2024년 청룡의 해가 시나브로 저물어가는 11월의 캘린더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연말이 되면 나름대로 한 해를 보람되게 살았다는 충만감보다는 아쉬움과 무기력감이 더 느껴진다.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도 특별히 기억하지도 않는 가사의 2절 같은 느낌이랄까. 1절이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을 찾아내서 더 의미 있게 매듭을 짓는 아름다운 2절도 있으련만, 2절은 1절의 반복이거나, 관심이 별로 없는 줄거리로 간주한다. 다가오는 새해는 2절 가사가 되어 값있는 삶을 꾸려보겠노라 다짐을 해보기는 하는데 글쎄 그렇게 펼쳐지려나.

가을바람이 피부를 스친다. 바람이 불고 간 자리에 살찐 가을이 노란 미소를 짓자, 억새가 신사의 모습을 드러내는 은빛 머리칼을 날리며 단정하게 인사를 한다. 맑은 날의 들녘을 걷는 상쾌한 기분은 걸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가을 낭만이리라. 그러다 보니 고복수가 부른 구십 해가 가까운 가요 ‘짝사랑’의 가사가 뇌리에 떠 오른다. “아아 ~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노랫말의 뜻도 제대로 모르고 따라 불렀던 짝사랑 노래 가사다. ‘으악새는 어떻게 생겼을까. ’으악새‘는 ’새‘일까. ’억새‘일까. 그렇다면 ’갈대‘와 ’억새‘는 어떻게 다를까. 그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1936년 발표된 이 노래는 떠나간 연인과 가을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고달픈 삶을 시적(詩的) 구성으로 한 은유적 표현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85년 육영수 여사를 떠나보낸 뒤 그리움의 심정을 달래는 술자리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나는 안톤 슈낙의 에세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 그러나 당신은 벌써 근 열흘이나 침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아나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렇게 작품에 담긴 슬픈 현상이 너무나 가슴 저리기 때문이다. 숱한 발길에 차이면서도 보란 듯이 웃어 보이며, 보도블록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드러내는 끈질긴 잡초의 근성은 대단한 생명력이다. 집들이 선물로 받은 거실에 자리한 화분은 5년여의 세월을 물만 마시고도 고운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생명체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해준 오뚜기 같은 집념을 키워온 것 같다. 우리의 감정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느끼는 기분에다 처해있는 환경을 둘러싼 분위기의 색깔이 더해지는 것이다. 누구나 슬픈 곡절 하나둘쯤의 사연을 간직한 채, 억누르며 살아가는 일상일 것이다. 슬퍼한다고 지난날이 원상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감정을 차마 이겨내지 못하고 그 속에 빠져 오늘을 사는 현실이다.

여행과 수확의 계절 시월이라 하지만 시월이 되면 우리 가족의 분위기는 무거워진다. 10여 년 전의 슬픈 그림자가 지금도 집안에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슬퍼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았던 그 시절의 꿈이었기에 가족 모두가 슬픔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 체, 살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덜기 위해 나들이를 제안했다. 오랜만의 ’가족나들이‘다. 나들이 일정은 ’성인(聖人)이 불법을 처음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법성포‘에서 외양이 고급스럽게 보이는 인의정이란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고, 최초의 불교도래지인 성지를 순례한 뒤, 영광대교를 지나 갯벌과 석양 노을이 아름다운 백수 해안도로에서 칠산 앞바다의 수평선 전경이 바라다보이는 커피숍을 찾아들었다. 그럴듯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삶을 음미해가면서 늦가을 정취를 나누는 정겨운 시간을 가졌다.

해안도로를 따라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인 백양사의 말사인 전남 영광군의 사찰 중에 으뜸이라는 불갑사(佛甲寺)로 향했다. 내년을 기약하며 시들어간 불갑사의 자랑인 꽃무릇 길 산책을 즐긴 다정하고 오붓한 시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가족과 함께한 나들이가 새로운 활력이 될 것 같아서 가슴이 뿌듯하다. 나이가 들면 외롭고 쓸쓸해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게 가을의 향수인가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낭만의 계절 가을, 가을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해보자. 조락(凋落)하는 슬픈 가을이 아닌 새로움으로 가는 생명을 비축(備蓄)하는 풍족한 결실의 계절 가을로 말이다. 우리 집안의 분위기도 언젠가는 되살아나 평온하고 즐거운 나들이가 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김형중 수필가는

시조시인. 에세이스트. 문학박사

한국문학신문 편집위원장. 새전북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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