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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그해 봄” 울보 신부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2월 28일 16시05분

“그해 봄”에서 젊은 날의 문정현 신부를 만났다. 그해 봄은 시간이며 장소다. 개나리꽃처럼 앙증맞은 노란색으로 장정 된 만화책이다. 민들레꽃처럼 가벼운 이 책에 박건웅 작가는 ‘인혁당 사형수 8명의 이야기’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족의 눈으로 그렸다. 삽화의 한 장면처럼 1975년 4월 9일 가족들이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하게 시신을 탈취하는 국가의 만행에 맞서 닭장차 밑에 드러누운 그의 몸을 차는 무심코 넘어갔다. 이 사건으로 문정현 신부는 고관절이 손상되어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며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만들어 50년을 싸워 온 1937년생 87세의 신부는 이제 조성만의 유서를 나무판에 새기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사달이 났다. 장례식장이 으레 그렇듯 조문하고, 유족에게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아는 얼굴이라도 있으면 합석하여 고인과의 인연을 끌어내어 서로 안부를 나누다 눈치껏 돌아오는 것이 상례이다. 그날은 달랐다. 후배의 장례식, 그것도 ‘근감소증’이라는 병명을 통보받고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사투를 겨루다 승패를 받아 든 현장은 무거웠다. 이런 장례식장은 술이라도 한 순배 돌면 각자 자기 설움에 겨워 예민해져서 금세 살얼음판이 되기 일쑤다. 그 아슬아슬한 자리를 저만치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눈을 감고 서 있는 문정현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광주 미문화원을 점거한 장조카를 먼저 떠나보낸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선거로 뽑은 민간 정부가 들어선 뒤,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떠난 이후에도 정부를 상대로 지금도 싸우고 있다. 부안 핵폐기장,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용산 철거 현장,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군산 수라갯벌에서. 그는 수라갯벌을 매립하여 건설하는 새만금공항이 생명 파괴 행위이며 민간공항으로 포장한 미 공군기지의 확장이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전쟁이 나면 군사공항이건 민간공항이건 가리지 않고 국가가 징발할 터인데 무슨 차이냐며 심정을 건들었다. 이제 한반도는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미중 패권전쟁에서 중국포위전략이 작동하는 미국의 최전선인데 정부를 이길 수 있겠는지 어줍잖게 덧붙였다. 문정현 신부는 미군기지가 확장되면 600년 된 팽나무가 죽을 텐데 아무도 관심이 없고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 왜 나에게 묻는 것이냐며 울었다.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상대를 미워해야 하는데 정부의 하는 짓이 잘못돼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팽나무를 살리기 위하여 싸운다고?

된바람이 세게 불던 날 옥서면 하제마을 팽나무를 찾았다. 본래 섬이었던 이곳에서 먼저 터 잡고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고려 시대부터 600년을 지켜온 팽나무는 200년 된 조선 시대 소나무의 어깨를 걸고 단단히 서 있다. 문정현 신부는 아예 군산시 옥서면에 거처를 옮기고 ‘평화바람’이라는 공동체를 꾸려 매월 셋째 주 토요일 팽팽 문화제를 열면서 지내고 있다. 이곳 창고를 개조한 비좁은 작업실에서 신부님은 조성만 열사의 유서를 붓으로 쓰고 끌로 파서 벚나무 판에 새겼다. 고등학생이던 조성만에게 영세를 주어 세상을 눈뜨게 한 신부는 아직도 조성만의 눈을 감기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산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유서를 손끝으로 직접 파서 아홉 장의 목판으로 되살려냈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 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모든 죽음의 자리에 문정현 신부가 있다. 그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돈다 울면서. 그가 사랑하는 것은 생명이고 평화다. 그 생명과 평화를 위하여 어디든 간다. 그런 그를 김중미 작가는 “길 위의 신부 문정현”이라고 부르며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여러 모양으로 우는 문정현 신부를 그려냈다. 자기를 위하여 울지 않고 세상을 위하여 우는 신부가 군산 하제에 있다. 600년 된 팽나무와 함께. 매월 셋째 주 토요일 그곳에서 잔치가 열린다. /이진일( 전북미래혁신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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