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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호국·문화경찰의 표상 차일혁(車一赫) 경무관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6월 19일 19시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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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호국(護國)은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의미와 함께 보훈(報勳)은 공훈에 보답한다는 의미다.

호국·문화경찰의 표상으로 알려진 ‘차일혁(1920~1958)’ 경무관.

차일혁은 1920년 8월 20일 김제 금산면에서 태어나 15세 때 홍성공업전수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1936년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발언을 하였던 조선인 교사를 체포하려던 일제 고등계 형사를 때려서 일본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이후 1937년 독립운동가 김지강 선생의 권유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군과 맞섰고 조선의용대에 가입해서 무장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일제 패망 후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사형시킨 일제 경찰인 ‘사이가 이치로’를 사살키도 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제18전투경찰 대대장으로 지리산을 무대로 하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내장사를 보호하기 위해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토벌작전 중‘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문짝 만을 떼어내 태워 전소를 막았고 소각될 위기에 처한 쌍계사·천은사·선운사 등의 고찰을 보호해 ‘문화경찰’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차일혁은 네 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았다. 이강(李剛)은 일본 형사를 공격하고 금강산 도피 후 중국 황포군관학교 시절까지 사용했다. 차철(車喆)은 해방 후 김지강 선생을 따라 친일경찰을 처단할 때 사용했고, 미군정의 수사망을 피해 진주로 내려와서 부터 본명인 차일혁을 썼다. 6·25때는 전북지역에서 인민군 보급차량을 습격한 이후 보복을 피하기 위해 부모님께서 지어준 차갑수(車甲洙)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처럼 여러 이름을 사용한 것만 봐도 격동의 현대사에서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91년 방영된 MBC 드라마‘여명의 눈동자’의 실제모델인 차일혁은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후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러 주기도 했다. 좌우 이데올로기가 극심하게 대립하던 시절, 자신의 행동에 의심을 하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차 경무관은 2014년 9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고, 2017년 9월 29일에는 내장산 문화광장 내에 그를 추모하기 위한 흉상이 세워졌다.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고 있는 오늘 그가 남긴 명언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문화를 잃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잃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잃는 것은 나라를 잃는 것이다.’라는 말을 되새겨 본다.



/오승옥(마을활동가·관광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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