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가야금 소리에 넋을 잃었던 청년, 천상의 소리를 만들다.

명인 명장 악기장 허희철

35년 경륜, 남에게 맡길 법도 하지만
일과의 절반 가까운 시간 직접 대패질
가야금·아쟁·해금·비파·25 현금 등
국내 수준급 연주자들 주문이 이어져
국악발전 위해 교육과정 개편 필요해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5월 27일 13시09분

좋은 악기를 만드는 일은 나무를 고르고. 다듬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허 장인을 악기장 입문 이후 나무 공부를 하고, 대패질하는데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갓 스무 살 청년은 하릴없이 매형의 악기 공방에 들렀다. 거기서 우연히 한 젊은 연주자의 가야금 소리를 듣고 넋을 잃었다. 그 길로 가야금 연주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를 넋 놓게 한 소리를 흉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각오가 굳었다지만 하루아침에 12줄을 주무르고, 뜯어내며 심금을 울릴 수는 없는 법. 스무 살 청년이던 허희철 악기장이 가야금과 거문고, 아쟁과 해금 등을 다루고 만드는 악공(樂工)의 길에 들어서게 된 연유다.

악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쉬울 리는 없었다. “온종일 대패질만 했습니다. 악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대패질을 배우는 것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악기장이 되겠다고 스승의 문하게 들어간 허 장인에게 맡겨진 일은 대패질, 난생처음 잡는 대패를 잡고 일과의 대부분을 나무를 다듬는 일에 매진했다. “나뭇결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훌륭한 악기를 만들 수 없고, 결을 알아야 제대로 된 소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무에 혼을 불어넣어야 천상의 소리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게 지론이다.

35년 경륜으로 남에게 맡길 법도 하지만 지금도 일과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대패질을 직접 하는 이유다.

대패질은 결국 나무를 아는 일이다. 그래서 허 장인은 악기 만들 나무를 직접 고른다. “나무를 보면 그 성질이 보이거든요. 특히 이 나무가 어느 토질에서 어떤 나무와 어울려 얼마만큼 비와 햇볕을 누리고 어느 방향으로 자랐는지도 판별할 만큼 나무 공부를 합니다. 실제 그는 악기와는 무관해 보이는 나무 공부를 위해 전남대 임학과에서 수학했다.

이렇게 고른 나무는 다시 야외에서 4~5년을, 실내에서 일 년여를 건조한 뒤 최종 악기 만들 나무를 선택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악기 만드는 일이 손에 익숙해지자 소리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이런저런 고서와 이론 서적을 구해 읽어보아도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30대 늦깎이로 대학의 문을 두드리게 된 이유다.

전남도립대학교 한국음악과에서 그는 국악기의 이론적인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실무와 이론이 갖춰지자 그에게 색다른 제안이 이어졌다. 옛 무덤 같은 곳에서 출토된 고(古)악기를 복원해 만들어달라는 의뢰다.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한번 해볼 만한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 여겼다.

지금까지 그가 복원에 참여했던 고악기는 대전 서구 월평동 '양이두'와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의 '요고'를 비롯해 마한 시대 신창동 출토 현악기, 고산 윤선도의 유물 악기인 '고산유금' 백제 금동대향로에 표현된 다섯 개의 악기 가운데 '완함' '백제금' '백제고' 등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다.

그는 2001년 처음 악기 만들기에 입문한 광주를 떠나 난계 박연의 태생지인 충북 영동군으로 근거지를 옮겨 스승인 국가 문화재 조준석 선생을 따라 국악기 제작 전시 체험에 혼을 쏟았다.

그러다 지난 2019년 국악기 제작에 입문한 지 30년 만에 무주 공예촌에 동국 국악기를 설립하면서 스승을 떠나 독립하게 된다.

"국악의 불모지인 무주에서 우리의 국악과 국악기를 알리고 싶다는 도전 의식 때문이었다”라는 설명이다. 국악기 제작을 위한 조용한 작업장 환경과 일교차가 큰 무주의 풍부한 오동나무가 악기장인 허 씨에게 다른 무엇보다 큰 큰 매력으로 다가온 것도 무주로 둥지를 옮겨 된 이유다.

허 장인의 열정과 솜씨는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에게 인정받으며 국내 수준급 연주자들의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허 씨가 만드는 악기의 종류도 가야금을 비롯해 아쟁과 해금, 비파, 25 현금, 대아쟁, 정악 가야금 등 거의 모든 국악 현악기다.

“대다수 장인의 수요가 많은 가야금과 해금만 배우고 나갑니다. 하지만 명색이 악기장이라면 모든 악기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고 여겨 고집스레 매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열정과 사명만으로 쉽지 않은 일도 많다. 코로나19가 덮치면서 대면 국악 수업이 힘들어지고 공연도 줄줄이 취소되면서 국악기 수요도 덩달아 곤두박질쳤다.

공방을 찾던 악기 제작 체험 관광객들도 크게 줄었다. 전국의 30여 개 현악기 제작업체 가운데 두어 곳이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허 장인이 혼을 쏟아 만든 악기는 진안 마이산 명인명품관에 전시돼 있고 전남 담양에도 그의 장인 혼이 담긴 대금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 악기에 대한 열정과 집념은 그의 작업장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 대패와 각종 끌, 칼 같은 도구를 스스로 만들어 쓸 정도다.

국악기와 관련한 정부 정책에 아쉬움도 크다. "중국은 1945년 무렵부터 전통악기 개량이 국가 주도로 이뤄져 현악기의 줄을 명주실에서 철사로 개량했고, 북한도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에 현대식으로 개량한 '옥류금'을 완성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우리에게 걸맞은 개량이 필요한데 개인재산을 들여서 하기에는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국악 발전을 위해 악기 개량뿐만 아니라 교육과정의 개편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현재 초등 5학년 과정에 있는 단소 배우기도 플라스틱이 아니라 대나무로 바꿔 제대로 된 음색을 경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이론 과정에 그치는 중등 과정의 음악 교과도 실기를 겸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해야 합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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