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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상기 요건과 동등한 자격'과 음서제도


기사 작성:  임병식 편집국장 - 2015.02.25 18:40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朝鮮)을 세운 이성계는 건국 초기 바빴다. 신생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고려 왕조에 봉사했던 권신들을 축출했다. 왕씨(王氏) 일족도 몰살시켰다. 이어 사병을 혁파하고 통치기구를 개편했다. 정점은 측근 인사로 나타났다.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린 뒤 조선을 세우기까지 동고동락한 동지들에 대한 고마움을 자리로 표시했다. 핵심은 평화롭게 권력을 나누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신도감을 설치해 개국공신 52명을 발표했다. 이른바 친정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공신에게는 부(땅과 노비)와 명예, 특권을 부여했다.

더 큰 혜택은 보이지 않는 권한이다. 공신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고, 죄를 짓더라도 반역죄가 아니면 용서했다. 또 대를 물려 벼슬을 세습할 수 있는 음직(蔭職)을 보장했다. 오늘날에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왕조시대에는 당연시 됐다. 음직은 조선 500년 내내 음서제도라는 이름으로 운용됐다. 조상을 잘 만나면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기에 대단한 특혜였다. 흔히 “조상 잘못 만나 개고생한다”는 자조적 표현은 이같은 연유에서 비롯됐다. 빽없고 가진 것 없는 서민들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데 형태만 달리한 음서제도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정권교체 때마다 전 정권 인사들을 내쫓고, 그 자리를 나눠갖는 행태가 되풀이 되고 있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가릴 것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랬고, 송하진 전북지사도 마찬가지다. 다른 게 있다면 대통령에게는 상대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가 많다는 것이다. 인사권을 중앙정부가 틀어쥔 까닭에 지방 자치단체장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제한적이다. 자리도 많지도 않다. 그렇지만 부적격자일지라도 편법을 동원해 자기 사람을 심고 있다.

지방공기업과 출연기관도 뒤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상기 요건과 동등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라는 항목이다. 이는 요술지팡이와 같다. 이런저런 자격 요건을 내건 뒤, 말미에 단서를 붙인다. 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좋은 인재를 채용하라는 것인데, 취지와 달리 입맛에 맞는 특정인을 채용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송하진 지사는 취임 이후 출연기관장을 비롯해 별정직 공무원을 다수 채용했다. 홍보기획과장, 전북발전연구원장, 전북신용보증재단 이사장, 도립미술관장이 대표적이다. 채용 과정에서 두루뭉술한 요건을 적용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상당수는 학연에서 겹친다. 우연이겠지만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온 동문이 유독 눈에 뜨인다. 물론 해당 분야에 적합한 전문적 식견을 갖춘 인물도 있지만 더러는 어거지로 구색을 갖춘 정황도 없지 않다. ‘상기 요건과 동등한 자격’을 적용한 탓에 딱히 시비(?) 걸기도 어렵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거리다. 전북도와 전주시 산하 출연기관들도 뒤질세라 해당 규정을 한껏 활용하고 있다. 엊그제 본지 보도를 통해 알려진 전주탄소기술원은 좋은 사례다. 전주시 국장 아들은 ‘상기 요건과 동등한 자격’에 해당돼 채용됐다.

해당 국장은 탄소 관련 업무를 오랜동안 해왔고 탄소기술원을 관리 감독하는 입장에 있다. 아무리 공정함을 항변해도 오해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때문에 현대판 음서제도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전북테크노파크도 기업지원단장을 채용하면서 자의적인 기준을 적용했다. 테크노파크에 맞는 전문 인력을 채용하기보다 특정인사 자리 만들어주기 흔적이 짙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지역 사정에 밝은 지역 인물’이라는 애매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상기 요건과 동등한’ ‘지역사정에 밝은 인물’ 따위는 단체장들이 애용하는(?) 수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치단체마다 이런류 편법을 통해 자기 사람을 심고 있다. 또 지방공기업과 출연기관도 예외 없이 모호한 규정을 앞세워 특정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스펙을 갖추고도 직장을 잡지 못하는 자녀를 둔 이들에게는 분통 터질 노릇이다. 편법을 바로잡지 않는한 누구도 결과에 승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현대판 음서제도나 다름 없는 인사 채용 기준을 손볼 때가 됐다. 전북도의회와 감사 부서는 차제에 자치단체와 출연기관에 광범위하게 만연된 편법 인사를 뿌리 뽑아야 한다. /임병식 편집국장  montlim@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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