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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전북]초록바위에서 동서고금을 회통한다

36 전주이야기- 초록바위에서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8월 18일 13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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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전다리서 본 '초록바위'와 초록바위에 설치된 동학혁명기 사발통문 조형물





1. 동학과 서학, 옛과 지금의 회통장소 초록바위



전주 초록바위는 서학으로 조선을 ‘개화’하려던 서학인과 동학으로 조선을 ‘다시개벽’하려던 동학인들이 처형된 곳이다. 전동성당에서 싸전다리 넘어 오른쪽이 초록바위이다. 초록바위에서 전래 동요 ‘두껍아’를 부른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릴 때 모래 놀이하며 불렀다.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다만 형, 누나에게서 배워서 불렀다. 정신의 유전자가 질기다. 지금 생각하니 개벽가이다. 근대 130여 년 결국은 조선의 헌집(?)을 허물고 새집을 준 것은 서학의 개화였다. 동학으로 새집을 짓지 못했다. 서학이 준 집을 억지로 받았다. 천지를 흔들며 전주 남문과 서문으로 입성하던 동학혁명군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세동점한 서구적 근대와 천지공물 대동세계가 대립한 상징이 펼쳐진다. 근대와 동서고금을 회통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근대 우승열패와 생주이멸한 정신의 모든 상징이 다 보인다. 동학인과 서학인의 순교지가 같다. 천주의 세계 서학성당이 보인다. 천인합일의 수양관을 가진 향교도 보인다, 임금의 뜰인 경기전과 민의 마을, 한옥마을과 근대성 가득한 신시가지, 후백제의 옛 성터에서 아파트 성까지 다 보인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 하자는 원불교 교당도 보인다. 동학혁명기념관도 보인다.



​ 전동성당은 하필이면 임금의 뜰인 경기전과 길 하나 사이에서 건축되었을까? 순교 성지에 성당을 짓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무엄하다. 향교와 임금을 모신 경기전과 감영 앞이라니, 그 시건방이 첨탑처럼 하늘을 찌르다면 과도할까...?

초록바위는 동과 서가 대립하고 살육한 곳이다. 조선 왕조국가의 지배기구인 전라감영과 동학혁명의 관민상화 집강소가 있었다. 동서고금이 맺힌 곳에서 이제는 동서고금이 회통하는 다시개벽시대를 사유해본다.



식민주의자들이 기술과 산업으로 조선의 개화파들을 유혹하였다. 조선의 개화파들이 전기, 자동차, 전화에 홀렸다. 외세 식민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개화파의 우측은 친일파가 되었다. 동방의 천자체계를 잊은 사대부들은 왕조라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였다. 하여 서학과 동학을 탄압하였다. 서학 역시 조선의 문명을 무시하였다. 공동체 유지의 한 덕목인 제사를 미신으로 치부하였다. 조급하였다. 서양 선비다운 맛이 없었다. 배타적인 신앙인들이었다. 조선의 사회 조성 원리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근대 백여 년의 우승열패에서 우승은 서학이었다. 동학은 우금치를 지나 장흥에서, 대둔산에서 무너졌다. 왕조국가도 망했다. 그래서 임금의 뜰 경기전 앞에 하늘로 솟은 첨탑의 성당이 건립될 수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 원리가 동방의 천지체계 유기적 원리보다 더 진보한 것이라는 주술에 빠져 있는 것일까? 옛은 항시 낡은 것인가? 지금보다 아름다운 옛은 없다는 일직선의 진화사관에 빠진 것은 아닌가?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의 김개남 장군 가묘, 그의 개벽 세상은 열리고 있는가?



2. 근대에 던지는 질문들

좌우와 진보, 보수로 새기지 않겠다. 민주적인 근대국가 형성으로 보지도 않겠다. 원자화된 개인으로 보지도 않겠다. 수많은 책들이 이미 붕어빵처럼 하는 말을 여기 또 적을 까닭이 없다. 그냥 130여 년의 춘추전국시대라 하겠다. 한반도의 백년은 동서고금의 모든 것들이 들끓는 용광로였다. 몇 천 년 역사에서 백년은 잠깐이다. 역사를 더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질문에 질문을 더 한다.



․ 천지체계의 유기적 원리가 배타적 단독자 국민국가로로 된 것은 진보인가?

․ 후천적 인격도야의 천인합일의 인성이 후천적 노력 없는 천부적 개인의 인권은 진보인가?

․ 천지공물의 만주(萬主) 사라지고 이기적 개인 간의 민주는 진보인가?

․ ‘하늘 천 따 지’ 우주원리부터 배우던 소학이 ‘나는 철수이다’ 라는 개인원리를 배우는 소학은 진보인가?

․ 두레의 자치공동체로부터 계약 공동체로 이행은 진보인가?

․ 자기통치에서 선거 정치로의 이행은 진보인가?

․ 자유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모든 것을 담지한다는 국가주의는 진보인가?

․ 그렇다면 민주 이후의, 근대 이후의 국가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 인간적 규모의 마을이 국가를 매개하지 않고 천지체계로 직행하는 것은 가능한가?



옛집이 다 낡은 헌집은 아니다. 천년을 가도 아름다운 집이 많다. 헌집은 낡아서 소멸하지만, 아름다운 옛집은 오늘로 소통하니 늘 새집이다. 너희와 우리가 서로 더하여 천지를 이루니 그 천지 역시 우리 모두의 집이다. 천지공물이요, 천지대동이다.



초록바위에서 남으로는 후백제 견훤의 옛터 남고산성이 있는 고덕산이다. 동남으로는 승암산과 천주교 성지인 치명자산이다. 동북으로는 한옥마을이다. 북으로는 전주 구시가지가 보인다. 전라북도 구도청은 사라지고 전라감영 선화당이 복원되었다. 감영의 복원이되 감영인가?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집강소인가? 초록바위에서는 전주의 멋진 풍경들이 손에 잡힐 만한 거리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뜻으로 와닿지 않으면 별 볼일 없는 풍경이다. 기린봉에 떠오르는 달 기린토월(麒麟吐月), ‘한벽루와 어우러지는 맑고 푸른 전주천의 아침 물안개와 낮게 깔리는 저녁노을의 빼어난 풍광’인 한벽청연(寒碧晴烟), 고뇌를 위로하기도 하고 깊어지게도 하는 고덕산 남고사의 저녁종소리 남고모종(南固暮鐘), 다가천변 활터에서 활 쏘는 모습인 다가사후(多佳射侯)가 있다.



3. 초록바위에서 개남장(開南丈)을 생각한다



수많은 동학인들과 서학인들이 초록바위에서 처형되었으나 김개남의 이야기만 여기 적는다. 김개남(金開南, 1853~95)은 정읍 산외 사람이다. 농민군 주요 지도자 중에 가장 급진적이었다고 전한다. 기범(箕範)이었는데 김개남으로 스스로 고쳤다고 한다. 종손이 계셨는데 2018년에 타개했다. 개남의 남(南)은 남녘 남이 아닌 나머지 남으로 읽는다. 천대 받는 나머지 사람들이 개벽을 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일찍이 동학의 후천개벽에 눈을 떠 대접주가 되었다. 기포하여 전주화약 집강소 시기에는 남원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2차봉기 실패 후 정읍의 산외에서 피체되었다. 도움을 청한 임병찬의 배신과 밀고였다. 훗날의 의병장 임병찬(林炳瓚1851~1916)의 밀고로 1894년 12월 1일 산외에서 피체된 김개남은 초록바위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설치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주고 받은 문서를 정리한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에서는 내용이 다르다. 김개남은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되고 머리는 한양으로 보내져 12월 24~27일까지 서소문 밖 네거리에 효수됐다고 한다. 서교장은 초록바위에서 전주천을 타고 북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곳이다. 진북동의 옛 해성학교 자리, 지금의 동국아파트 ‘서교장’에서 처형되었다는 주장이다. 역사적 상상력으로 초록바위로 생각한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서울로 압송하여야 할 김개남을 전주에서 처형한 데에는 여러 설이 있다. 탈출에 대한 염려, 김개남에 당한 양반들의 처형 요구, 흥선대원군과의 연관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입막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 “적 김개남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았다. 심영(沁營)의 중군 황헌주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 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라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김개남과 임병찬은 친구였다. 그러나 왕조를 대하는 태도는 이리 달랐다. 임병찬은 일제에 맞서 의병 투쟁을 하다가 유배지인 거문도에서 순국했다. 우국지사로 알려진 황현(黃玹1855~1910)도 동학혁명에 대해 「오하기문」에서 감사 김학진의 머리는 아침에 메달고 적괴 전봉준의 시체는 저녁에 찢고 싶었다고 한다. 고답한 유학자의 생각은 동학이나 서학이나 이름만 다를 뿐 천주(한울님)을 섬기기는 마찬가지라 보았을 것이다. 또한 무지몽매한 천한 것들이 병장기를 얻어 양반을 능욕하는 것으로 밖에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이리도 달랐다. - 다음회에 이어짐 -

/강주영(건축시공기술사·목수·전 교육부 대표 시민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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