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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발걸음] 비 갠 뒤 꺼낸 머릿속 에피소드

“이제 나도 꼰대로 보여질 수도 있는 것인가?
손해 본 것은 없는데 왠지 나만 손해 본 것 같다”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08월 17일 13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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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경(고창문화관광재단 사무국장)



10만원의 기적.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외지 관광객이 숙박을 하기 위해 들렀다. 숙박비로 10만원을 받은 호텔 주인은 세탁소에 빚진 10만원을 갚는다. 세탁소 주인은 청과상에 빚진 과일값 10만원을 갚고, 청과상 주인은 가전제품 수리 후 지불 하지 못한 10만원을 전파상에 지불한다. 전파상은 또 자기가 빚진 10만원을 이웃에게 지불했고, 그 이웃은 호텔에서 빌린 10만원을 갚았다. 이후 숙박하기로 한 관광객이 급한 볼일이 있어 숙박을 취소하고, 미리 지불한 10만원을 돌려받아 그 마을을 떠난다. 관광객은 떠났지만 이제 이 마을은 서로에게 진 빚이 없는 마을이 된다. 누가 이득이고, 누가 손해를 본 걸까? 얼핏 받아야 할 빚과 갚아야 할 빚에 대한 등가가 이루어졌기에 손해가 전혀 없는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예전에 과일을 팔아 쌀과 고기를 샀어야 할 돈이 주머니에 들어가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괜히 좋다 말았다.

고향에 대한 기억.

고향이 어디입니까? 묻는다면 ‘내 고향은 집 옆에 작은 야산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이 드리우고, 동년배들이랑 함께 물장구치던 물 맑은 개울이 있으며, 눈 내린 하얀 겨울날 철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드는 공기 좋은 시골마을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음의 고향이다. 하지만 지금 내 고향은 둥그런 보름달 얼굴 속에서 방아 찧는 토끼의 그림자는 그대로더라도 문명이 깊이 배여 시커먼 아스팔트 위로 자동차가 연일 매연을 뱉어내는 예전 시골 풍광이 잠식되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요즈음 아이들이 태어난 고향은 99%가 ‘병원’이다. 태어난 이후 내가 태어나서 자란 자연과 벗한 마음의 고향보다는 물리적 환경이 지배한 고향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십 수 년이 지나 먼 훗날 ‘고향이 어디입니까?’라는 똑같은 질문이 던져진다면 ‘제 고향은 시험관입니다’라는 대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분명 문명의 공해는 사람의 환경을 폐허로 만들고, 인간의 창의적 지혜를 첨단 이란 명분으로 기계속에 노예로 부품화 하고 있다. 세상은 변했고, 앞으로 더 많이 더 빠르게 변해갈 것이다. 관계와 소통의 방식도 바뀔 것이다. 그렇다고 성장하며 벗 삼은 주변 환경속에서 쌓인 추억 가득한 마음의 고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동시대를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부침이 더 나은 자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움.

잃어버린 부끄러움을 찾아 보려고 온종일 헤메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다 창경원 원숭이 엉덩이에서 찾았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우연히 들른 공간. 옛 추억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떠들고, 호방하지도 않은 사람이 애써 호방한 척 호기를 부리던 철부지 모습도 떠오른다. 나 스스로 실소가 머금어진다. 내 얘기가 무조건 맞다고 피력하며 우겨대던 모습, 지 혼자 잘난마냥 허세쩔게 설쳐댔던 모습, 의도하진 않았지만 남을 무시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린 철부지 행동과 기억들 …. 창경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피어오른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자성해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여자의 아름다움은 때론 아이들의 웃음으로, 사회 속에 오피니언 리더로 대체되기도 한다. 미적 아름다움이 아닌 헌신과 희생을 감내한 삶의 노정이 쓰여진 일기가 된다. 나를 반추해보면 시간과 함께 사라진 것은 오만과 편견이며, 찾은 것은 나의 일에 대한 긍지일 것이다. 진짜 그럴까? 또 부끄러워진다.

다시 또 지금.

알면 신세대, 모르면 구세대로 분류되는 줄임말의 현실은 오래다. ‘버카충’ ‘빼박캔트’, ‘낄끼빠빠’, ‘인싸’, ‘아싸’, ‘스압주의’ 등. 익숙해지니 이젠 사자성어보다 더 어려운 단어들이 또 다시 숨통을 조여온다. 그래서 선택했다. 무조건 줄이고 보는 신조어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 순간 짜증이 밀려온다. 이제 나도 기성세대로 전락해 버렸나? 그럼 이제 나도 꼰대로 보여질 수도 있는 것인가? 손해 본 것은 없는데 왠지 나만 손해 본 것 같다.

생각을 고쳐먹자.

나도 모르게 부정으로 치부되어버린 존재로서 내가 아니라 분명 10만원의 기적이 보여준 것처럼 살아오며 손해 본 것에 대해 무언가로 나에게 등가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삭막해져 버린 도시의 삶 속에서 어릴 적 고향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마음을 함께 나눌 사람들을 얻었을 수도 있고, 부끄러움 없이 과감히 도전했던 젊은 시절의 경험이 현재의 나로 이끌어 왔을 수도 있다. 사람들과의 부침 속에서 진일보한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식과 지혜, 생각의 힘을 얻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 갠 뒤 하늘, 무섭게 짓누르는 땡볕의 여름 축제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풀고, 끄르고, 헤치면서 사색의 노를 조심히 저어본다. 분명 내일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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