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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백의 전북의 기억]<7> 미군 '딘' 소장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9년 10월 08일 14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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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 상전면 구룡리 세동마을의 비대치(鼻大峙), 세칭 ‘코크니재’-.

이 곳은 한 미군 장군과 한 한국인의 운명을 뿌리채 뒤바꿔 놓은 얄궂은 운명의 고개이다. 1950년 6 · 25 동란 때의 일이다.

포로로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1953년 9월 4일 귀환한 미군 딘 사단장.

당시 미군의 지상군 사령관이며 미 24사단장이었던 월리암 · F · 딘 소장은 부대에서 낙오, 무주. 진안 등지를 헤매다가 결국에는 포로가 되었고, 우연히 그 곳에서 만났던 한국인은 9 · 28 수복 후, 이를 북한 인민군에게 고발하여 포로가 되게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6 · 25 동란 때, 남하하는 북한 공산군에 의해 대전(大田)의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7월 19일이었다. 이 곳 작전에 투입되었던 미 육군 24사단은 적의 공격에 지리멸렬, 사단 자체가 흩어져 버렸고, 사단장 딘 소장마저 실종되어 행방이 묘연했다.

이같이 부대에서 실종된 딘 사단장은 대전 인근의 산을 헤메다가 7월 21일, 전북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의 깊은 골짝인 고방마을의 조항산(鳥項山 · 해발 800m) 기슭에서 김주원(金周元)씨에게 발견되어 그의 도움을 받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친 · 인척간이어서 인공 치하에서도 딘 소장 숨겨 준 비밀이 보장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딘 장군은 박종구씨 집의 구석방에서 2박 3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어 7월 24일에는 대구방면으로 가기 위해서 나섰다. 그러나 길을 몰라 주변의 산 속을 헤매다가 7월 30일 진안군 상전면 구룡리 세동마을의 코크니재에서 한 청년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한두규(韓斗圭)-. 그는 이웃 안천면 노성리 하보마을 사람으로 대한청년단 임원과 의용소방대장 등 우익단체에 관여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자수하면 살 수 있다고 해서 실은 진안읍에 자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 딘소장을 고발했다는 죄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생전의 한두규씨.마침 코크니재에 이르자 허름하게 생긴 한 미국인을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놀랬다. 한씨는 그가 미군의 딘 소장인지는 생각조차 못했다. 한씨는 배고프다는 몸짓을 하는 그를 데리고 상전면 언건마을(현 진안읍 운산리)의 한 주막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요기를 한던 중 딘 소장은 느닷없이 나타난 무장청년에 의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당시 딘소장은 포로로 전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울을 거쳐 북으로 끌려갔다.

이로 인해 한씨는 9 ·28 수복이 되자 사직당국으로부터 호출을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 부산까지 불려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결코 자신이 고발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재판에 회부되어 5년형을 살고 나왔다.

한씨는 판사가 선고할 때 방청석을 향해 두 손을 들고〃여러분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참으로 억울하고 기가 막힙니다.〃라고 크게 소리를 치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이같이 하여 한씨가 옥중생활을 하던 1953년 9월 4일, 딘 소장은 휴전협정에 의해 북한에서 살아서 돌아 왔다.

한씨는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몇 차례 서울의 미 대사관을 찾아갔다. 딘 소장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미 대사관에서는 거절하는 것이었다.

한씨는 생전에〃죄인은 죄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 왔다. 한가지 뼈에 사무치는 한(恨)이 있는데 그것은 딘 소장과의 기구한 만남으로 7남매의 자식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불이익을 받은 것 …〃이라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한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이 되어 반세기 동안 고발자란 낙인이 찍힌채 어두운 생활을 해야만 했던 한두규씨-. 그는 죽는 그날까지 〃나는 결코 딘 소장을 고발하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살다가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자손들은 용담댐 건설로 수몰민이 되어 현재 전주 등지에서 살고 있다.



1963년 5월, 무주 고방마을을 찾은 딘 소장의 아들 빈 대위.

〃위험 불구 아버지 도와줘 감사〃

1963년 딘 소장 아들 고방마을 방문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 고방마을은 큰 길에서 2km 떨어진 재넘어 산골짝의 외딴 마을이다. 고개를 들면 그야말로 하늘 밖에 보이지 않는 산골 마을이다.

1963년 5월 16일-, 이 마을에 사전에 무슨 연락도 없이 주한미군의 한 장교가 돌연 찾아왔다.

그는 군산비행장에서 근무하는 미 공군 대위로 딘 소장의 아들이다. 그는 6 · 25 한국동란 때 아버지를 도와준 이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 온 것이다.

딘 대위는 〃그 난리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아버지를 도와 준 이 마을 여러분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진심으로 그 고마움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 마을 옆에 기념식수까지 했다. 그러나 그 나무(전나무)는 잘 자라지 못하고 이내 말라 죽었다.

당시 딘 소장은 박종구(朴鍾九 · 93세)씨 집의 한평 남짓한 구석진 골방에서 2박3일을 지냈다.

박씨의 회고에 의하면 그 때는 오늘날과 달라 식사 대접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4km 밖에까지 나가서 달걀을 사왔고, 그 밖에는 여름이라 감자, 옥수수, 야채 등으로 겨우 끼니를 잇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딘 소장이 이 마을에서 피신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이 마을 7가구 사람들은 모두가 친 · 인척간이 아니면 사돈들이었기 때문이었다./전북향토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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