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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고 숭고한 그림으로 추는 춤

김스미의 미술산책〈63〉 유휴열의‘추어나 푸돗던고’

무아지경 춤사위에 세상사 시름이 저만치 허공에
주름 알루미늄에 오방색을 채워 고운 봄날의 서사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3월 05일 13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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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추어나 푸돗던고〉, 2004, 259×193cm, 캔버스에 아크릴

〈생·놀이-愛〉, 2024, 97×61cm, 알루미늄 혼합재료



“내 밥은 쌀이 아니라 물감이었어” 물감 찌꺼기를 모아 밥그릇에 담으면서 미소 짓는다. 그는 전주 모악산 기슭에서 44년간 신명 나게 그림만 그려온 화가 유휴열(1949-)이다. 이 그림 천재는 예술이란 이름의 수공업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지만, 결코 천재인 척하지 않았다. 창작의 비결에 능통한 그는 자신을 키운 예술의 원천이 방대한 작업이었음을 물감 밥그릇으로 증명해 보인다.

작품을 보면 작가가 보인다. 사람은 몰라도 전주 사람이면 유휴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게 된다. 거침없는 붓놀림과 환상적인 색채감각, 심연을 마구 뒤흔드는 역동적인 구성의 아우라가 아마 그는 전생도 화가였음을 짐작게 한다.

그렇지 않고는 그가 평생 화두로 한 작품 〈생·놀이〉 연작의 방대한 흐름을 깊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삶과 예술의 접점이 어디일까? 사람의 생로병사 고통과 슬픔의 해방구는 어디일까? 작가 유휴열의 작품 속에 해답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 살풀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유로워졌고 관객은 작품을 보며 자신의 생채기를 보듬는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또 하나의 감동은 노작의 성실함에 배어나는 작업의 진실성이다.

‘추어나 푸돗던고’는 신명 난 군상의 춤 놀이를 추상으로 표현한 연작으로 ‘푸돗던고’는 ‘풀었던가’의 고어(古語)로 유휴열이 해석한 신조어다. 굿판에서 벌이는 춤꾼의 현란한 동작이 하늘을 덮고 땅을 진동시키는 광란의 퍼포먼스다. 무희의 무아지경 춤사위에 세상사 시름이 저만치 허공에 흩어진다. 작품의 주연배우는 구체적인 형태가 없다. 그러나 누가 봐도 딱 신명 난 몸짓의 향연이다. 관객은 비구상의 자유로움 속에서 무한한 판타지를 만끽하며 일상의 억압에서 잠시 해방된다. 그가 모악산이라는 신령스러운 땅 기운이 서린 곳에 터를 잡고 산 이유가 따로 있었다.

유휴열이 알루미늄을 작품 소재로 사용한 것은 1980년대 중반 미국전시를 통해 얻은 영감 때문이었다. 한지나 흙 작업을 하던 그가 알루미늄이라는 메탈에 자동차 도료를 사용하며 새롭게 변신한다. 작품에 대한 변화의 갈망은 작가의 필연적 사명이다.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그의 부단한 실험정신은 대형작품인 2008년‘율’, 2010년 ‘생(生)·놀이’, 2016 ‘관계’ 등의 시리즈를 선보이며 범접할 수 없는 예술의 최고경지에 이른다.

지면의 작품 ‘생·놀이-愛’는 낙원의 유토피아다. 주름진 알루미늄 특유의 느낌을 살리고 오방색 물감을 점점이 채워 고운 봄날의 서사를 잔잔하게 전한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동산에는 파랑새가 노래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희망이 넘친다. 망자의 한을 풀어내는 무녀의 춤에 영혼을 불어넣는 물질과 의식의 중첩이라는 오랜 작업을 지나 이토록 천진난만한 평화라니.... 삶의 희로애락도 대가의 손끝에선 시간이 흐를수록 순수한 동화가 된다.

미술관 수장고 세 개를 가득 채운 수천 점 작품들을 들여다보며 숙연해진다. 유휴열은 숱한 낮과 밤을 지새우면서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어선 차원 높은 예술세계를 완성해 간다. 위대한 작가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자기만의 독특한 조형 언어를 창조해야 하며 그것이 아주 특별하고 완벽한 디테일이어야 한다. 예술로 한 세계를 연 유휴열은 눈 뜨면 그림 그리는 화가로서 영원한 현역이다./화가, 칼럼니스트 김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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