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월요아침]이판사판(理判事判)

“이판사판은 사생결단이 아니라 불교에서 승려를 말한다.”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6월 16일 14시28분

‘이판사판’은 어떤 일을 하거나 막다른 곳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또는 결과야 어떻게 되든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체념적 의사 표시로 사용한다. 이판사판의 원래 뜻과는 다르게 이처럼 막 나간다거나 사생결단이라는 부정적으로 쓰인다. 그렇지만 이판(理判)과 사판(事判)은 조선시대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승려를 의미한다.

조선은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 정책을 폈다. 그래서 불교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승려는 천민 계급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승려들이 살아갈 길을 모색했는데, 그것은 사찰을 존속시키고, 다른 하나는 불법의 역사를 잇는 것이었다.

일부 승려들은 사찰의 폐사를 막기 위해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잡역에 종사하면서 사찰을 유지 시켰다. 이와 같이 주지 등 승려들이 사찰의 재물과 사무를 담당하는 일을 사판(事判)이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승려를 사판승(事判僧) 또는 산림승(産林僧)이라고도 한다.

반면에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은둔하여 참선이나 불경을 읽으며 수행하는 일을 이판(理判)이라 한다. 이처럼 수행을 통해 불법을 잇는 승려를 이판승(理判僧)이라 하며, 공부승(工夫僧)이라고도 한다. 이판과 사판은 수레의 양 바퀴처럼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이판승들과 사판승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개회의를 하여 판단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이판사판공사판(理判事判供辭判)’이라 한다.

이판사판은 ‘이판사판공사판’의 줄임말로, 이치를 밝혀 수행하는 이판승(理判僧)과 절간 살림살이를 맡은 사판승(事判僧)이 대중공사를 한다. 즉 절에서는 이판사판이 다 필요하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때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이판이든 사판이든 막다른 선택이었다. 그래서 일단 출가하면 이판과 사판, 둘 가운데 어느 한쪽을 골라야 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천주교도 불교처럼 수련과 사무로 나누어져 있다. 신부의 수련을 받기 위해서 또는 신부가 되어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하는 사람들은 이판에 속한다. 그리고 추기경이나 주교 등 사무를 처리하는 신부들과 같이 실제로 앞에 나서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사판에 속한다.

불교와 천주교가 동일한 것은 이처럼 이판이나 사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각각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 분규가 일어나서 조계사에서 각목 들고 깡패와 같이 그렇게 분규를 일으켜 서로 재정권을 차지하려 해도 불교계가 꿈쩍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많은 이판들이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도를 닦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도 마찬가지다. 한때, 일부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이 밖으로 나타난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천주교가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숨겨진 빙산과 같이 수많은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도를 닦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나 천주교가 이판들이 있는 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와 비교해서 기독교는 성도 개개인이 불교 언어로 말하면 이판과 사판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목사와 장로, 성도들이 세상에 속하여 말씀과 기도로 영적 수련을 통해 이판의 일을 하고 있다. 또 한 편으로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교회에서 이런저런 직분을 맡아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 성도들이 교회 내어서나 사회 속에서 사판에 매력을 가지고 달려드는 데 있다. 위험한 것은 불교는 각목을 들고 설쳐도 이판이 있고 천주교는 수도승이 있지만, 기독교에는 없다. 그래서 사판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판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는 기독교인들이 더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속세의 이치는 다르다. 무지한 부자도, 가난한 도인도 다 반쪽이다. 사람 속에 살면서 돈과 명예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났다. 이치도 훤히 밝은데 세상일도 잘해 지혜와 복을 함께 넉넉히 갖추면 양면에 걸림 없이 잘 살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일이다. 지금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세간의 일에도 출세의 이치에도 다 밝은 자가 잘 사는 세상이 돼버렸다./이태현(고원공간정보 부회장·전 무주부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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