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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한국 정치와 종교, 분열을 넘어 새로운 통합의 문화로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5월 28일 16시41분

비폭력 민주화운동의 선구자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강조한 ‘씨ᄋᆞᆯ’은 생명과 진리, 참나를 일깨우는 존재로서의 민초 즉 시민을 의미한다. 씨ᄋᆞᆯ 사상은 기독교의 영성, 불교의 불성사상, 유교와 도교의 도덕철학이 어우러진 통합적 사유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군대를 동원해 헌정 질서를 정면으로 위협했고, 사회는 순식간에 혐오와 갈등, 배제와 파괴의 언어로 얼룩졌다. 그로 인해 민주공동체의 윤리적 기반은 심각하게 흔들렸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단을 내렸지만, 그것이 곧 위기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가오는 6월 3일 대통령선거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민주 시민들이 주권자로서의 책임을 다시 자각하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이 선거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에 대한 집단적 선택이다. 이제 정치권은 갈라치기와 편 가르기를 넘어, 진정한 통합의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 통합적 민주정치는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공공선을 향해 나아가는 책임의 정치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 지형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상대에 대한 혐오와 단죄, 진영 논리에 갇힌 공방은 국민의 삶을 외면한 채 소모적인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통합을 외치면서도 실상은 내부 결속을 위한 적대의 논리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는 어떤 선거 결과도 사회적 치유와 통합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계엄 사태로 인한 사회적 갈등에는 정치의 책임 못지않게, 종교계의 책임 또한 크다. 특히 일부 보수 개신교 교회는 정치세력과 연대하여 권력의 편에 서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해왔다. ‘광장의 종교’는 신의 이름을 앞세워 타인을 심판하고 배제하며, 결국 신앙의 본령을 훼손했다. 종교는 인간의 고통을 위로하고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는 영적 공동체여야 한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 교회는 오히려 갈등의 도구가 되어, 정치권력과 손잡고 사회적 갈등을 확대하는 데 일조하였다. 진정한 종교적 영성을 회복하기 위한 깊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현재의 교육은 경쟁과 서열을 중시하고 공존과 협력의 가치는 소외되고 있다. 특히 종교에 대한 이해는 윤리나 역사 과목 속 부차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어 다종교 사회로 진입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다종교 이해 교육’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서로 다른 종교와 세계관을 이해하고, 타인의 신념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민주사회의 시민 덕목이자 통합의 전제조건이다.

우리 민족은 이미 공존의 철학을 품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은 고대 건국신화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생명존중과 평화지향의 공동체 윤리를 담은 정신이다. 이는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시민과의 연대 가능성을 제시하는 철학적 기반이기도 하다. 또한, 불교의 회통사상은 서로 다른 교리 간 조화와 타 종교 포용을 강조하며, 『화엄경』의 인드라망처럼 서로 연결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친다. 동학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평등 사상이며, 원불교는 모든 존재가 은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아래 보은의 삶을 실천의 덕목으로 삼는다. 일제강점기 3·1독립운동에서 나타난 종교계의 초종교적 연대와 군사독재 시절 개신교와 가톨릭이 주도한 민주화운동은 한국 종교가 지닌 회통적 전통과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유산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밭에 다시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고 있다. 정치가 민의를 대변하고, 종교가 혐오 대신 영적 지도와 연대의 길을 걷고, 교육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로운 사유를 가르칠 때, 비로소 분열을 넘어선 새로운 통합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씨ᄋᆞᆯ인 시민의 각성과 실천이야말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키는 힘이다.

/박광수(원광대학교 명예교수, K-전통문화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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