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삶의 향기]민주주의의 강심장(强心腸)

기사 작성: 박은희 - 2025년 11월 06일 14시51분

21세기 한국 정치의 핵심적 특징은 ‘분화된 정체성 정치’의 심화와 함께 ‘무당층(無黨層)’의 급증이라는 양면적 현상이다. 무당층은 단순히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중립적 유권자가 아니라, 이념적 피로감과 사회경제적 불만, 그리고 정치적 불신이 중첩된 결과로 형성된 복합적 집단이다. 2020년대 중반 이후 여론조사에서 무당층은 전체 유권자의 약 30~40%에 달하며, 이들은 선거의 결정적 스윙보터(swing voter)로 기능하고 있다.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이는 단순한 정치 무관심이 아니라, 정치적 대표성의 위기(political representation crisis) 가 심화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샤이 보수 혹은 샤이 진보의 등장은 무당층의 또 다른 형태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선거에서는 특정 진영에 힘을 보태는 ‘은폐된 이념적 유권자’다. 특히 SNS와 유튜브 등 개인화된 미디어 공간의 확산은 정치적 견해의 표출을 ‘사회적 위험 행위’로 만들었다. 그 결과 다수의 유권자가 자신을 ‘샤이’한 위치에 두며, 이는 여론조사와 실제 선거 결과 사이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무당층과 샤이 집단의 확대는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위기와 맞닿아 있다. 정치학적으로 보았을 때, 민주주의의 안정성은 정당체계의 제도화 수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Mainwaring & Scully, 1995). 그러나 한국의 정당은 여전히 ‘인물 중심적’이고 ‘선거 동원형’ 구조에 머물러 있다.

이로 인해 정당은 사회경제적 갈등을 대변하는 제도적 매개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대리인의 부재’를 느낀 시민들은 정치적 냉소주의(political cynicism)에 빠진다. 무당층의 확대는 곧 ‘정당 체계의 탈제도화’(de-institutionalization of party system)를 상징하는 지표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무당층과 샤이 유권자의 증가는 계급적 균열(class cleavage) 의 약화와 세대·문화적 균열(cultural cleavage) 의 강화로 해석된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정치는 산업화 세대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젊은 세대의 ‘공정성 가치’, ‘젠더 인식’, ‘주거 불평등’ 등이 새로운 정치적 분할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기존 정당이 이러한 변화된 의제 구조를 포섭하지 못한 결과, ‘정치적 무연고층’이 확산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중도주의의 부상이 아니라, 기존 정치 담론의 의미 붕괴라 할 수 있다.

특히 샤이 보수층의 증가는 ‘도덕적 낙인’과 ‘정치적 위축’의 산물이다. 진보 진영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미디어와 학계, 시민사회에 뿌리내리면서, 보수적 견해를 표명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침묵시키는 전략을 택한다. 반면 샤이 진보층은 정치권 내부의 부패, 내로남불, 정책 실패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후퇴한 유동층이다. 이 두 집단 모두 공통적으로 정치 불신과 피로감을 공유하며, 이는 ‘정치의 심리학적 탈주(escape from politics)’ 현상으로 나타난다.

미래적으로 이 흐름은 한국 정치의 양극화를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침묵 속의 분열’(silent polarization) 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겉으로는 중도적 균형이 유지되는 듯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정체성의 불안과 체제 불신이 누적되어 폭발적 변동성을 예고한다. 이는 정당 정치가 기능 부전을 보이는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조로, 이탈리아나 일본의 ‘무당층 민주주의’(party-less democracy)와 유사한 궤적을 보인다. 즉, 표면적 다원주의 아래 잠재적 권위주의가 부활할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되는 것이다.

정치사회학적 해법은 명확하다. 첫째, 정당은 ‘이념적 전쟁터’가 아니라 ‘정책적 중개자’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둘째, 시민사회는 정치적 발화를 도덕화하거나 낙인화하는 문화적 관성을 벗어나야 한다. 셋째, 국가 차원에서는 ‘정치 교육’과 ‘참여 민주주의’ 프로그램을 강화하여, 시민이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위험을 자각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무당층과 샤이 유권자의 증가는 단순한 중도화나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정치적 언어를 잃어버린 시대, 다시 말해 공동체적 토론의 장이 사라진 시대의 징후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가 말했듯, “민주주의는 의견이 아니라 토론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무당층의 부상은 그 토론이 멈춘 자리에서 태어난 새로운 ‘정치적 침묵’이며, 이 침묵이 길어질수록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은 더 약해질 것이다.

/배문철(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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