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5년07월18일 19:27 회원가입 Log in 카카오톡 채널 추가 버튼
IMG-LOGO

침묵, 말 없음의 있음

[책마주보기]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김혜영)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4월 21일 07시40분

IMG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침묵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실존의 방식이자 자유와 책임을 묻는 적극적인 행위임을 강조한다. 침묵은 종종 말의 부재, 또는 감정의 억압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말보다 더 강력한 존재의 진술이 될 수 있다는 언급이다.

가정 형편 때문에 친척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진 소녀가 난생처음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사랑의 온기를 느끼는 과정이 수채화처럼 그려지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 역시 침묵에 대한 존재의 이야기로써 감정 표현이 미숙한 어린 소녀가 침묵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킨셀라 부부가 보여주는 침묵 속의 사랑은 소녀의 내면에 숨겨진 슬픔과 상실의 감정을 위로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저씨는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몰라서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잃기도 한다며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강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가 하면 아주머니는 ‘해야 할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하는’것을 칭찬하며 말의 효용성을 가르친다.

무엇보다 사랑을 받아본 아이가 성장하여 사랑을 베푸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암묵적 진실을 이면하고 있다. 그러니까 맡겨진 소녀는 형편상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던 집에서와 달리 친척 부부의 환대를 받으며 평안과 따뜻한 정을 느끼게 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우게 된다. 타인의 아픈 상처를 수다스럽게 얘기하는 이웃 여자와 아주머니의 행동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다름 혹은 차이가 존재함을 알아차린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말은 곧 침묵이고 침묵은 곧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소녀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 원작을 토대로 '말 없는 소녀'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책은 휴머니즘적인 면과 함께 대중성도 지니고 있다.

주목할 것은 소녀가 이러한 침묵 속에서 점차 ‘말하기’의 주체로 변모해가는 과정이다.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그 경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됨으로써 능동적 주체성을 획득한다. 그 세계가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작은 경험들이 모여 지금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언어 능력의 회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과 자각을 의미한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소녀는 점차 질문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말을 선택하는 것이 그것이다. 침묵을 깨고 더 이상 타자(어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자기 존재의 주체가 되는 순간 침묵은 단지 언어의 부재가 아니다. 침묵은 문학적 요소이기도 하며 철학적 요소로도 작동한다. 말하자면 침묵은 문학적 요소와 철학적 요소의 교직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문학이 철학적 사유를 감각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책은 소녀의 인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낸다. 나아가 존재와 언어, 그리고 침묵의 바깥에 흐르는 의미를 재조명한다. 거기에는 존재를 향한 말 없음의 있음이 항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영 작가는



2018년 ‘수필과비평’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부안학생교육문화관 공감 독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종근 기자의 최근기사

Leave a Comment


카카오톡 로그인을 통해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