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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정화암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첫 조명

김제역사연구회, 광복 80주년·육삼정의거 92주년 기념 '김제출신' 정화암 학술대회 개최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3월 12일 14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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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역사연구회가 21일 오후 2시 김제시 교월동 행정복지센터 2층 회의실에서 광복 80주년·육삼정의거 92주년 기념 정화암 학술대회를 갖는다. 아나키스트 정화암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처음으로 조명하는 자리다.

김형관(부안학연구소 대표, 중국 무순대학교 교수)의 사회로 박찬희 김제역사연구회 위원장의 개회사, 정성주 김제시장, 서승 온다라역사연구회 원장의 축사에 이어 배기성 매불쑈 역사 강사가 기조강연 '화암의 국적은 어디인가?'를 갖는다.

주제발표1은 '아나키스트 정화암의 독립운동'이다. 발표는 박나현 국가보훈부 연구원, 토론은 이춘구 칼럼니스트(전 KBS국장)가 맡는다. 주제발표2는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 정화암의 활동-혁신정당 운동과 독립운동사 편찬 활동'이다.

발표는 강용훈 나루역사문화연구소 대표, 토론은 김경민 전북역사문화교육원 원장이 맡는다.

끝순서엔 종합 토론도 준비됐다. 좌장은 강승규 우석대학교 명예교수,이춘구 칼럼니스트, 김경민 전북역사문화교육원 원장은 토론자로 참여한다.

김제역사연구회가 주최·주관하며, 온다라역사연구회, 전북역사문화교육원, 부안학연구소, 나루역사문화연구소 등이 후원한다.

정화암(鄭華岩, 1896~1981)은 김제시 장화동에서 1896년 9월 14일 출생,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며, 1920년에는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일본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24년부턴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했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맹, 활동했다.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했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 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상해부(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上海部)를 조직했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했다.

또, 중국내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좀더 강화하고 상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轉向者) 등을 색출, 암살 대상으로 지목, 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했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했다.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本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 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일본요리집에 초청,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有吉明)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이강훈 등이 체포됐다.

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團)'이란 별동대를 조직, 무력투쟁을 하도록 했고, 1937년 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했으며, 1940년부터는 이 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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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선생님의 불굴의 투혼을 기리고 해방독립을 위한 고귀한 정신을 알리는 귀한 학술대회를 준비한 많은 분들의 헌신을 감사합니다.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고 후대에 알리는 노력을 해주시는 김제역사연구회 관계자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참세상 (2025.03.16 1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