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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관후한 성품으로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인정을 베풀다

23회. 관대하고 후덕한 마음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3월 06일 14시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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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필원잡기』: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이 야사와 사대부 일화, 전고 등을 기록한 필기집 ---> 자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고 권력자인 정승의 자리는 왕을 보필하면서 왕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돕고 백관을 통솔했다. 또 관직에 맞는 인재를 잘 배치해서 행정이 원활히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책무가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는 엄격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함을 베풀어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데 부끄러움이 없어야 했다.

1433년(세종 15년) 세종이 최윤덕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제수할 때 “공명하고 청렴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수상으로 삼을지라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하면서 “그 임무가 지극히 중함으로 함부로 뽑을 수 없고 작은 벼슬을 제수할 적에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그 임무가 지극히 중한 정승을 함부로 뽑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정승이 갖추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이르는 말이었고 세종의 바람대로 정승의 기준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단연 황희였다.

신하 안승선이 어느날 세종에게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 황희처럼 생각이 깊고 먼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고 말하자 세종 역시 “그대의 말이 옳다. 지금 대신 중에 황희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며 황희를 신망했다.



태종 때 행대감찰이었던 이장손이 황희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황희를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세종 때 와서 좌의정이 된 황희가 인사행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이장손은 경기도 통진 군수로 임기가 다 끝나가고 있었다. 관료들은 황희가 이장손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황희는 오히려 이장손이 직무에 충실했던 사람이라고 높게 평하면서 그를 사간원의 헌납으로 승진할 수 있게 천거했으며 이어 의정부 사인으로 발탁하는 관대함을 보여주어 신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 전해지는 일화로 관료 수십 명과 함께 정청에서 식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황희가 밥을 먹으려고 할 때, 밥 속에 벌레가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러나 놀라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미 덜어놓았던 밥 속에 벌레를 숨기고는 밥을 먹었다고 한다. 어쩌면 주방 하인들이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가장 높은 지위의 황희가 이 일을 덮었으니 다른 관료들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아랫사람을 헤아릴 줄 아는 황희의 인자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황희는 자기가 부리는 노비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며 인정을 베풀었다.

조선시대 소나 말과 같은 가축처럼 매매가 이뤄지던 노비들의 삶은 비참했고 인간으로서의 존중감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다.

황희의 집에도 노비는 있었다. 가마를 타고, 다녔다고 하니 가마를 맬 노비가 필요했고 농사를 짓는 노비와 집안일을 해줄 여종도 함께 살았을 것이다. 다만 전답이 많지 않았고 오랜 관직 생활에도 불구하고 모은 재산이 없어 노비들은 10명이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황희는 노비들도 하늘이 내린 백성이라며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었고 차별을 두지 않았다.

서거정이 쓴 『필원잡기』에 황희의 인품을 칭송하는 내용이 나온다.



익성공 황희는 동량이 넓고 커서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정승의 자리에 30년이나 있었고, 향년이 90이었다. 국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는 관대하기에 힘쓰고, 평상시에 마음이 담박하여 비록 아들, 손자, 종의 자식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울부짖고 장난하고 떠들어도 조금도 꾸짖어 금하지를 아니하며, 어떤 때는 수염을 잡아 뽑고 뺨을 쳐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황희 정승의 유배 생활 모습을 재현한 남원 초당



그의 후덕함을 알 수 있는 이야기 중 세 가지를 소개한다.



당시 명필가로 꼽혔던 이석형이 황희의 집에 찾아왔다. 담소를 나누던 중 황희가 책 한 권을 꺼내어 새로 표지를 만들었으니, 제목을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석형은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황희의 정중한 부탁을 더는 거절할 수 없어 제목을 써주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혼자서 놀다가 이석형이 써준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이것을 본 황희는 아이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아랫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책과 바닥에 묻은 오줌을 닦아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이의 젖은 옷을 벗겨 아이에게 다시 주면서 “괜찮으니까, 엄마한테 가서 옷을 갈아입혀 달라고 하거라” 하면서 우는 아이를 달래서 밖으로 내보냈다.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은 이석형에게 황희는 진심으로 미안함을 전했다. 잠시 후 아이의 엄마인 여종이 밖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죽을죄를 지었다며 용서를 빌었다.

오히려 황희는 따뜻한 말투로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하며 위로해 주었다.

황희의 너그러움에 감동한 이석형은 황희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고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이웃집 철없는 아이들이 한창 놀고 있었다. 그러다 황희의 집 마당에 있는 잘 익은 배를 보자 돌을 던져 열매를 땅에 가득히 떨어뜨렸다.

이를 본 황희가 큰 소리로 어린 종을 부르는 것을 본 아이들은 자신들을 잡아 와 혼내려고 하는 줄 알고 모두 달아나 몰래 숨어 엿 보았다.

그런데 황희는 어린 종에게 그릇을 가져오게 하더니 “떨어진 배를 주워서 이웃집 아이들에게 갖다주라”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종 둘이 다투고 있는데 황희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다 마주치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상대방이 잘못해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라며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황희는 “그래 네 말이 옳다.”면서 다독여 주었다.

그러자 다른 종이 억울해하면서 상대방이 잘못한 거라고 변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이야기를 다 들어준 황희는 “그렇다면 네 말도 옳다.”면서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고는 두 여종을 타일러 돌려보냈다.

이를 지켜본 황희의 조카가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고 하시면 어찌합니까? 한 나라의 정승께서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주시지 않고 그리도 사리가 분명치 않아서 어찌합니까?” 하며 못마땅해했다.

그러자 “네 말도 옳다.”면서 환하게 웃더니 계속 글만 읽었다고 한다.

황희는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으나 사적인 일에는 종의 마음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대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온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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