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아침발걸음]체스터턴의 울타리(Chesterton Fence)

기존의 제도, 관습, 규칙이 만들어진 이유를 알기 전에는 그것을
함부로 바꾸거나 없애지 말라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10월 07일 15시12분

윤석열 정부는 최근 주창한 의료개혁 4대 정책이야말로 필수의료와 무너져가는 지역의료를 다시 살릴 최선의 방향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이 의료개혁을 추진해 나갈 골든 타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 정부의 의료개혁 4대 과제는 ‘의료 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확보’, ‘보상체계의 공정성 제고’다. 이 계획은 ‘의료인력의 확충’이라는 첫 단계에서부터 의료계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급제동이 걸렸다.

이에 대하여 “체스터턴의 울타리” 이야기가 타산지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체스터턴의 울타리(Chesterton's Fence)는 보존과 변화, 전통과 혁신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유이다. 이 비유는 처음 등장한 이후로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인용되었으며, 특히 정치, 사회, 경영, 기술 혁신, 철학 등에서 깊은 통찰을 제공해 왔다.

체스터턴의 울타리는 영국 작가 G.K. 체스터턴(G.K. Chesterton)이 그의 저서 『The Thing』에서 소개한 개념이다. 체스터턴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이 비유를 설명한다.

“길을 가다가 울타리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개혁가가 와서 '이 울타리는 필요 없으니 없애버립시다”라고 말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먼저 이 울타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아내라. 그 이유를 이해한 다음에도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없애도 늦지 않다”고.

이 비유는 현재의 제도나 관습, 규칙을 이해하기 전에 무작정 변화시키려는 태도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체스터턴은 현명한 변경은 기존의 시스템이 왜 존재하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한 후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일정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 비유를 잘 드러내는 사건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마오쩌둥의 지시로 중국에서 일어난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이 그것이다. 곧, 네 가지 해로운 동물, 즉 참새, 쥐, 모기, 파리를 제거하는 운동이다. 다른 동물에 비해 비교적 잡기 쉬운 것이 참새였다. 그래서 모든 인민들이 너나 할것없이 참새 박멸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인민들은 참새를 잡을 뿐 아니라 참새가 내려앉지 못하도록 냄비, 후라이팬, 북을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주었고, 참새 둥지를 허물고 그속의 알을 깨뜨렸다. 또 잡은 수량에 따라 정부에서 상(賞)을 주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처참하였다. 참새는 멸종 위기에 처했고 천적이 없어진 메뚜기를 비롯한 해충이 중국 전역을 덮어 쌀 생산량이 오히려 급감했다. 그 후 3년간 대기근으로 수천만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그때야 비로소 중국 지도부는 참새의 이로운 점을 깨닫고 소련에서 참새 20만 마리를 공수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되지 않은 것들, 곧 법과 제도나 정책 등을 접했을 때에 그것들은 과거에 당면한 상황(situation)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여 선택한 결과임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체스터턴의 울타리 이론이 사회 변화나 현실 개혁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제도나 정책의 존재 이유가 충분히 확인되고, 또한 그 제도나 정책이 지금에 와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 그것을 치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거에는 유용했던 것들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더 이상 유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라도 남원 출신 명재상 황희는 50년간의 벼슬살이 중 20여 년간 판서를 역임하고 30여 년간 정승(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 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그는 전임자를 탓하거나 전임자의 허물을 들춰내지도 아니하였거니와 가급적 전임자의 방침이나 정책을 새로이 바꾸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 방침이 실제 현장에 맞지 않으면 그 맞지 않은 부분만을 기워 보태어 사용하였다. 그리고 주어진 일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하여 재임 중 명재상으로서의 능력과 덕성을 발휘하였다.

오늘날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 정책은 기존의 의료제도가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분석과 그것이 지금도 유용한가 유용하지 아니한가를 알아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 무척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시급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부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조용하게 기워 넣으면 그만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일이 아니다.

/유종국(전 전북과학대 교수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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