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금요수필]그 평창댁

신팔복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8월 28일 14시02분

길은 멀었다. 전주에서 주문진까지 한나절이 걸렸다. 산을 좋아해서 출발한 일정인데 월정사 정문에 도착하니 봄철 산불 예방으로 등산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전에 알아보지 않고 찾아온 게 낭패였다. 아내의 의견을 물어 험한 진부령, 진고개를 넘어서 저녁노을과 함께 찾아간 곳이 동해안의 주문진이었다. 좌우 사방으로 빼곡히 들어선 건어물 시장은 화려한 불빛으로 휘황찬란했다. 관광객이 적어 한산했다. 불빛 밝은 가게를 둘러보고 저녁 식사를 하려고 골목으로 찾아갔다. 작지만 깨끗해 보이는 한 식당에 들어섰다. 좀 나이 든 여인이 ‘어서 오세요.’ 하며 반갑게 맞아준다. 내 억양을 눈치챈 그녀는 어디서 오냐고 물었다. ‘전주에서 왔습니다.’ 하니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했단다. 생선 매운탕을 주문하고 상호가 평창식당이라서 연유를 물으니 평창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북한 말씨가 섞여 있었다. 부지런한 솜씨로 금방 맛깔나게 한 상을 차려냈다.

한 수저 뜨는 생선 매운탕 맛이 일품이었다. 옆에 서서 지켜보던 그녀가 새로운 반찬을 다시 내어놓는다. 요즘 보기 드문 친절이었다. 은근히 호기심이 발동하여 ‘평창이 시집인가요?’ 하고 물었다. 평창에서 왔지만, 원래는 고향은 함흥이란다. ‘요리도 잘하시는데 말씀도 잘하시네요.’ 하며 추임새를 엮으니 긴 호흡을 내쉬고 나서 다시 말씀을 이어갔다. 나보다 한 살 아래라는 그녀는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시작된 그해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 미군, 피란민 등 35만 명이 넘는 함흥 철수 때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다섯 명이 천신만고 끝에 배를 타고 내려왔단다. 주섬주섬 챙겨서 가져온 짐은 보따리 몇 개였다.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의 아우성을 귓전에 들으며 가족이 함께 내려온 것은 천만다행이었다고 한다. 오매불망 그리운 것이 고향인지라 언제 다시 돌아갈지 몰라 고향이 가까운 평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가파른 언덕길 남의 집 문간방을 얻어 보따리를 풀고 피난 내려온 사람들과 형제처럼 의지하며 어려운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때가 5살이었다. 기구한 생계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보급대 물품을 운반하는 일로 시작해서 막노동, 논밭일, 채탄 등 안 해본 일없이 갖은 고생을 이어왔고, 어머니 역시 남의 집 일과 식당 일까지 다니면서 돈을 모아 살아갈 수뿐이 없었다. 그때는 무척 가난했던 시절이라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화전을 일구어 양식을 보탰다. 봄나물에 산채 채취는 일상이 되었고, 고구마, 감자, 옥수수, 조, 메밀 등으로 허기를 면해가면서 살아왔다. 빼곡한 교실이었지만, 그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어 큰 행복이었다. 남보다 열심히 배웠고 국민학교를 마쳤다. 어머니를 도와 남의 집 식당 일을 거들게 되면서 차츰 요리에 손이 익었다. 결국엔 어머니와 작은 식당을 차렸다. ‘친절을 제일’로 알고 손님을 접대하여 돈을 모아 집도 사게 되었다.

아버지가 봐둔 헌칠한 총각과 인연을 맺어 딸과 아들을 낳아 길렀다. 그러던 중 할머니는 두고 온 작은아들의 생사를 몰라 오매불망 근심 걱정으로 세상을 살다가 눈도 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평창에 묘를 썼다. 세월이 지나 아버님,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그녀가 한참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오십 중반에 또 남편이 세상을 떴으니, 세월은 내 편이 아닌지 참으로 야속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한국전쟁은 그녀를 너무나도 처절하게 난도질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지’ 하며 이를 악물고 재기를 꿈꾼 것은 26년 전에 주문진으로 이사하여 이 일을 하게 되었단다. 안내해 준 숙소에 도착하여 식당의 소개로 왔다고 하니까 다른 곳에 비해 아침 밥값 정도를 빼주었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다시 식당으로 찾아갔다. 반갑게 맞으며 북엇국으로 차려주었다. 마이산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시장 상인회와 친구들과 세 차례나 다녀왔다며 탑사의 돌탑이 인상적이었다고 이야기할 때는 내 고향 사람을 만난 듯했다.

내가, 친절하게 대해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악수를 청했는데 주름진 얼굴에 굵어진 손마디에서 그녀의 삶은 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그녀는, 가난하고 못 배운 설움을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고 식당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아들과 딸을 대학교까지 졸업시킨 강한 어머니였다. 자세히 안내해준 여러 곳을 구경하고 내려왔지만, 그녀의 막막했던 지난날의 생활은 아마도 친절과 근검절약이 좌우명이 아닌가 한다.

신팔복 수필가는

한국문인, 전북문인, 진안문인, 전북수필, 행촌수필, 은빛수필, 영호남수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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