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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걷는다

김스미의 미술산책〈56〉 알베르토 자코메티 ‘걷는 남자’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7월 03일 14시12분

우리는 매일 걷는다. 프리패스권도 없고 돈도 없다. 성공하려면 목적에 따라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래서 눈 뜨면 일어나 걸었다. 진실하고 혹독한 안식처인 일터로 간다. 그러면서 꿈꾼다. 어디로 도피할 것인가?

예술의 길을 걷는 이는 더욱 가련하여 할 말조차 잊는다. 이상적인 것을 향해 고군분투하지만 제 자리를 빙빙 돌기 일쑤다. 지뢰밭 같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든 작은 골방에도 만만치 않은 존재의 번뇌가 턱 버티고 있다. 이런 인간의 고통을 해부하여 평온의 길로 안내한 것이 260자 반야심경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고뇌하는 사람을 더욱 처연하게 만든 조각이 있다. 몰골만 성성하게 가느다란 팔과 다리로 성큼 걷는다. 스위스에서 나고 자란 현대 조각의 거장이며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작품이다. 자코메티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였던 아버지, 조반니의 유전자를 물려받고 동생 디에고가 평생 조수가 되어 애틋한 형제애를 나눈다.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아버지와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꿈을 키우고 화가이자 조각가로 성장한다.

〈걷는 남자〉는 그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남자는, 태어나 결국 죽음으로 가는 어느 신작로를 걷는 외로운 무명씨를 대표한다. 살도 한 점 없이 만지면 으스러질 것 같은 앙상한 뼈다귀만 있다. 자코메티는 왜 저 우아하고 섹시한 로댕의 근육을 전부 해체해 버렸을까? 인간의 껍데기인 허상을 버리고 결국 원형만을 바라보게 한 위대한 작품이다. 자코메티가 바라본 인간의 실체다. 즉 보이는 형상을 넘어 관념의 안경을 벗은 편안한 실존이다.

〈걷는 남자〉, 1960, 청동조각, 180.5cm, 〈가리키는 남자〉, 1947, 청동조각, 178cm, 〈빨간 옷을 입은 캐롤린〉, 1964-65, 유화, 36.33×25.74, /파리 자코메티재단 제공

자코메티는 1921년 뮈르스라는 노인과 인연이 되어 베네치아를 여행하던 중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자코메티는 그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경험한다. 번뇌의 보따리를 숙명처럼 붙들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본다. 이렇게 하여 자코메티 특유의 아주 독립적이면서 존엄한 인간이 탄생한다. 살짝 구부린 상체의 운동성이 불굴의 의연한 가능성으로도 보인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에너지는 존재로서 강렬한 실존의 힘이다.

금강경에는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는 구절이 있다. 직역하면 물체와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 임을 말한다. 자코메티는 외형의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주체로서 본질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 실상 또한 자코메티의 인생관일 뿐이다. 자기가 바라본 삶의 과정을 작품에 투영하며 쓸쓸히 길을 걸었다. 작업만이 유일하게 편안한 도피처였다.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분열과 부르주아 지식계급의 광적인 개인주의를 품고 있다는 존 버거의 주장에 필자도 조금은 공감한다. 예술작품은 미래세대를 말하지 않는다. 결국 동시대 환경이 작가의 예술혼으로 이미지화된다. 제작 시기와 관계없이 지금 관객이 공감하여 작품 앞에 장사진을 치면 틀림없는 명작이다.

피카소도 흠모한 조각 천재 자코메티는 1947년 〈가리키는 남자〉, 60년 〈걷는 남자〉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조각품을 만든 작가로 부와 명성을 이루었지만, 몽파르나스 7평 작업실을 40년간 고수한다. 심지어 물건의 위치도 그대로 둔 채 산다. 인간의 운명적 고독을 강렬하게 어필하고 그러나 힘차게 걸어가는 특별한 인간상을 만든 작가답게 삶도 간결하기 그지없이 공(空)했다. 대중들이 보내는 아부와 찬사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활 패턴을 이어간다.

자기 인생의 진정한 고수만이 진짜 내공을 가진 자로서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명사가 되는 법이다.

/ 화가 김스미

〈걷는 남자〉, 1960, 청동조각, 180.5cm

〈가리키는 남자〉, 1947, 청동조각, 178cm

〈빨간 옷을 입은 캐롤린〉, 1964-65, 유화, 36.33×25.74, 파리 자코메티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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