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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존재의 변주

[책마주보기]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문미숙)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5월 27일 07시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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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아오모리현에서 출생하여 1948년 도쿄의 한 수원지에 투신해 서른아홉 생을 마감했다. 이 소설 ‘인간 실격’은 ‘인간의 삶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한 사람’ 아니,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한 사나이의 유품으로 보이는 세 장의 사진과 세 편의 수기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세 장의 사진은 주인공 요조의 유년, 소년, 성년의 사진이다. 요조는 부유한 가정의 영특한 도련님으로 태어났으나 평범하지 않은 사고를 지녔다. 어린 요조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난해하고 불가사의했다. 지역의 유지인 아버지 앞에서는 존경과 찬양을 하다가 뒤에서는 조롱과 비난을 했다. 요조가 보기에 인간은 서로를 속이면서도 이상하게 상처 입지 않고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세상’으로 보였다. 그는 공포와 불안이 깃든 현실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익살’을 선택한다. 익살이라는 가면을 쓰면 자신의 두려움을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 방식은 ‘있다’는 것을 존재로 보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관이 주어져야 의미가 부여되고 비로소 서로의 ‘존재’가 된다. 요조와 호리키의 반의어 게임은 이러한 존재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게임은 한 명이 단어를 고르면 그에 대한 반의어를 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꽃의 반의어는 여자, 여자의 유의어는 창자, 창자의 반의어는 우유 등 언뜻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로 존재라기보다는 비존재의 연속이다. 마치 한순간도 존재자의 삶으로 살지 못한 요조의 삶을 변주하는 듯하다. 우리의 삶은 사실 비존재의 나날들이 더 많다. 불현듯 찾아온 존재의 순간은 이런 비존재를 배경으로 한다.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우주 안에 무수한 입자들이 실재하듯 비존재의 나날들이 현타의 순간을 맞으면 존재로 오는 것이다. 요조는 자신을 인간실격자, 진정한 폐인이라 말함으로 세상으로부터 혹은 누군가로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없다.

혹자는 순수를 갈망하던 요조가 타인(호리키)의 위선과 잔인함으로 파멸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하였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다시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타인으로부터 독립적인 나 같은 것은 없으며, 내 존재 안에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독립적인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계에 얽혀 생겨난 것이 나라는 존재인 것이다. 호리키는 요조와 대조된 인물이 아닌 요조 안에서 요조와 싸우는 또 다른 요조인 것이다. 애인의 겁탈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은 자신과 그런 장면을 보게 한 호리키를 동시에 경멸한다. 요조는 신에게 신뢰는, 무저항은 죄가 될 수 있느냐고 묻지만, 물음만 남겨두고 다시 무저항의 길로 떠난다. 요조의 삶은 처음의 원형을 벗어나지 못하는 변주의 반복인 것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부끄럼 많은 생을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이다. 다자이 요사무는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을까? 그것을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오늘도 비존재의 변주 속에서 존재를 찾아가려는 우리에게 ‘인간 실격’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문미숙 작가는



브런치작가, 문학으로 철학읽기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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