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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다른 사람과 소통하려는 마음

[책마주보기] 김혜진의 '경청'(하채현)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3월 11일 08시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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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이 있을까? 체력? 언변? 사고력? 아니다. 듣기 능력이다. 듣기 능력이 떨어지면 첫째, 남들과 소통을 잘 못한다. 이들을 ‘선택적 청각 상실자’라고도 한다. 두 번째, 자기 계발이 힘들어진다. 맘속에 교만이 차서 다른 지혜, 다른 교양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세 번째, 친구가 줄어든다. 친구는 주고받는 관계인데 들을 줄 모르고 3척(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동자이니 친구들이 떠날 수밖에. 겨우 한 줌 남은 친구마저 관리가 어렵다. 이런 사람을 시쳇말로 꼰대라고 한다. 자진하여 꼰대 완장을 차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꼰대임을 인정하고 편하게 살겠단다.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가 지쳤다고 두 손 두 발 들어 항복하는 자세다. 게다가 나이 든 꼰대 말고 청년꼰대도 늘고 있다. 혼자가 좋아 혼자서 사노라네 외치는 완강함은 청년꼰대가 늙은 꼰대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그래서 이번 책은 듣기 능력을 일컫는 김혜진의 '경청'이다.

원래 좋아하는 책은 아껴 읽는 편인데 김혜진의 소설은 그럴 수가 없다. 책 속 그들은 고시 준비생, 취업 준비생, 박봉의 월급쟁이, 요양원 근로자, 프리랜서 번역가, 소규모 사무실을 가진 상담소 직원 등이다. 나와 다르지 않다. 이것저것 따지는 소심쟁이들이고, 별거 아닌 것에 상처 입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내 얘기 같아서 한 번 잡으면 좀처럼 놓기 힘들다.

'경청'의 임해수는 남의 말을 듣는 직업을 가진 상담사였는데 불의의 사건으로 상담 능력을 잃고,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매일 쓰는 중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를 상대로 상담하던 그는 대본을 그대로 읽었을 뿐인데 명예훼손죄로 고소되었고 그 후 해고되었고 가정마저 해체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매일 소송, 해고와 가정 해체로 겪은 상처를 편지에 쓴다. 신문 기자에게, 변호사에게, 함께 했던 상담원 동료에게, 판사에게, 라디오 프로그램 피디에게, 남편에게, 상담원 원장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내 말은 무시한 채 맘대로 사건을 퍼뜨릴 수 있었는지 묻는다. 독자는 이 편지들을 읽으며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책 속에서 어떤 사람도 편지를 받지 못하므로 소통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책 제목이 작자의 소망이다. 경청하자, 경청하자.

그런데 ‘부치지 못하는 편지’와 ‘침묵’은 다를까? 침묵은 상대방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추어 두고, 상대방이 입을 떼도록 잠자코 기다리는 일이다. 상대방의 생각이 소중하다. 소통의 제1원칙이며 상담사가 주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부치지 못하는 편지는 반대다. 내 생각이 먼저다. 내 마음만 있고 상대방이 없다. (상대방이 있는 편지는 부쳐진다) 책 제목은 '경청'인데 책 속에는 온통 부치지 못하는 편지만 가득하니 심각한 소통 부재를 보여준다. 소통 부재는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제발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나와 아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상에서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이것을 공동체의 해체라고 할 수 있을까? 소통 중심 공동체에서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소통하는 일이 흔했는데 현대사회에 들어서서 공동체가 깨지자 직업 상담사가 급부상한 것 같다. 사람들은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 병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상담사를 찾아가 진료비를 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직업 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상담사와의 소통이 아니면 현대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뱉어질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정황은 인문학의 중심이 신학과 철학에서 상담학으로 넘어간 원인인지 모른다.

'경청' 마지막 장면에서 매일 편지만 쓰던 임해수는 길고양이 덕분에 알게 된 초등학생을 상대로 작은 접이 상을 펴고 상담의 장을 마련한다. 상처를 가진 이 초등학생이 상처투성이 임해수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극적인 장면이다. 나다운 나를 찾는 일은 나와 아주 다른 이 초등학생을 만나 소통하면서 가능해졌다. 서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통하는 능력을 ‘듣기 능력’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상담사를 찾아가서 내 이야기를 떨어놓기도 하겠지만 그와 함께 듣기 능력 기르기에 집중할 일이다.

새봄 새 학기 출발이다. 개구리가 노래하고 꽃망울이 터져나가 화사함이 떠도는 이 계절에 소통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경청'을 만나보자. 따뜻한 계절에 따뜻한 나와 아주 다른 존재물들과 교감을 나눠보자.





하채현 작가는



생태에세이 '수수에게 들키다' 저자

인문에세이 'AI와 미디어교육' 저자

군산대 인문도시센터 공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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