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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 조선조 36명의 급제자 배출한 인물의 고장’ 완주 구이면지 발간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1월 09일 14시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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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구이면지편찬추진위원회와 구이면행정복지센터가 ‘구이면지-귀동골 구이의 근현대 생활사(지은이 박노석, 정훈, 김철배, 최명표, 김규남, 황재남, 편집 및 디자인 우진디자인, 출판 휴먼21)’를 펴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전주 출신 과거 급제자 103명 가운데 36명이 구이 출신이거나 구이와 직결된 인물들이라고 한다. 구이 출신 생원 진사 합격자는 73명이 조사됐다. 진사 한 사람을 배출했다고 '진사'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기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듯하다.

구이면은 고려시대에 ‘귀이동’으로 불렸다. 본래 지명은 구이동면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엔 구이동면(龜耳洞面)이 “관아에서 30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구총수’에는 ‘구이동면(仇耳洞面)’으로 표기되어 있고, “호수가 1,006호, 인구가 3,38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洞)자를 뺀 후 ‘구이(九耳)’로 개칭됐다. 일제강점기 때 구이동면(龜耳洞面)의 ‘거북 귀(龜)’자를 ‘나라 이름 구(佉)’로 바꿔서 발음하기 좋게 바꾸고 다시 ‘나라 이름 구(佉)’가 쓰기가 어려워서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1914년에 난전면의 일부를 병합, 구이면이라 칭했다.

면의 유래는 구암(九岩)마을의 명칭 유래에서 부터 찾아볼 수 있다. 구암마을은 이 마을 뒷산 아래에 있는 거북바위로 인해 과거에는 귀동(龜洞)골이라 불렸고, 조선시대 말까지 귀동마을에 면청(面廳)이 있었으며 귀동이 구이로 변천되면서 거북바위는 오늘날까지 면 상징물이 됐다. 구암마을은 수원김씨와 동래정씨, 연안이씨 등이 잇따라 이주하면서 마을촌이 형성됐다. 이 지역은 고덕산 줄기를 따라 약 500리를 뻗어 내려와 옆엔 아버지산인 경각산과 앞에는 어머니산인 모악산 등이 자리잡은 장엄한 대명당으로 분류되고 있다. 명당인 이곳엔 조선조 8대 임금인 예종대왕의 태를 묻었다는 태실(胎室)이 있었고 태실 아래에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이 웅덩이에 살던 큰 거북이가 알을 낳던 중 하나가 이곳에 떨어져 거북바위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구암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천리에 속하게 됐고 덕천리에는 구암을 비롯 원덕천(元德川), 지등(芝登), 와동(瓦洞), 칠암(七岩), 청명(淸明) 등의 마을이 있다. 이 가운데 와동(瓦洞)은 모악산의 가슴에 와닿는 마을로서, 마을에 기와집이 많아 ‘기와 와(瓦)’자를 써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1920년께 물레방앗간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를 하면서 들른 집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심농 조기석(心農 趙沂錫, 1876~1935)의 집이다. 그는 덕진연못에 있는 취향정 편액을 쓴 서화가로 유명하다. 이때 최남선은 모악산 등정을 위해 전주 꽃밭정이를 거쳐 문정리를 지나 와동마을에 머물렀다 전한다. 지등(芝登)은 마을이 구릉지대에 형성돼 있고 많은 등성이가 있어 생긴 명칭이며, 칠암(七岩)은 마을 주위에 큰바위 일곱 개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모악산은 완주군 구이면과 전주시 삼천동, 그리고 김제시 금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구이면 쪽에서 산행을 하자면 학천(鶴川)마을을 거치게 된다. 학천마을은 모악산 중턱 벼락바위에서 학 한 마리가 주위를 살피던 중 벼락바위 남쪽에 있는 매바위를 보고 깜짝놀라 급히 도망치다가 이 마을 냇가에 이르러 쉬려고 멈췄을 때 진짜 매가 뒤쫓았으나 너무 지쳐 날지 못하고 냇가에서 죽었다. 그 후 마을 모습이 학과 같아 학천이라 불렸다 한다.

‘구이면지’에는 29개 성씨의 구이 입향과 유물·유적, 그리고 인물을 소개했다. 고문서 자료를 제공한 세 성씨의 경우는 그 자료를 토대로 조선시대 선비 집안의 생활사를 정리했다. 그런 전통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내용을, 마을별로 그리고 분야별로 정리했다. 면 단위의 작은 고을에서 세 명의 무형문화재와 두 명의 명인과 국회의원, 시장·군수, 도·군의회 의장·의원, 대사, 30여 명의 행정·사법 고시 합격자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배출한 내력을 소개했다.

두방마을에서 발견된 전주류씨지파족보(1628년, 류경식 소장)는 조선 초·중기 구이 성씨들의 혼인 관계를 한눈에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다.

유선희 구이면지 편찬추진위원장과 안소연 구이면장은 “조선시대에 36명의 과거급제자이 구이 세거 성씨 후손들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면서 “‘구이면지’ 발간은 면의 역사, 인물과 마을사, 생활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해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구이면 행정복지센터는 9일 오전 10시 '구이면지'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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