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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사라센의 칼, 칼의 변주곡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1년 01월 20일 13시50분








/박정혜(심상 시치료 센터장·전주대 겸임교수)









직면은 아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존 카밧진의 말처럼 일어나는 정서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치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그러하다. 구석진 곳에서 자행되는 것을 바라볼 용기가 필요하다. 올해 14일 개봉한 영화 ‘사라센의 칼’은 은폐한 문고리를 벗겨낸다.



영화가 시작하면, 컨테이너 건물을 주먹으로 치는 반장이 등장한다. 그곳은 공장에서 일하는 윤아의 숙소다. 욕망의 마수는 끈질기게 확장하며 점점 수위를 높여간다. 유리공장의 사장은 건실한 기독교 신자처럼 보인다. 같은 교회 소속의 은지를 경리로 두고 임금을 함부로 착복한다. 사장이 유린하는 또 다른 대상은 외국인 근로자 알란이다. 사장과 반장이 결탁한 욕망은 공장의 헤게모니를 이룬다. 평범한 근로자 두 명은 이들이 시키는 대로 행할 뿐이다. 밟아라 하면 밟고, 못 들은 척하라고 하면 그렇게 한다. 알란은 제때 임금을 받지 못하고, 폭언과 폭행을 당하기 일쑤다. 사장의 탐욕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을 막는 과정에서 알란은 칼에 맞아 죽고 만다.

‘칼’은 영화 속에서 여러 변주를 거친다. 인트로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사막, 낙타, 소녀 그리고 칼이 등장한다. 그 직전에 나타나는 자막 하나. ‘유목민들은 사막으로 향하기 전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새끼 낙타를 어미 낙타 앞에서 무참히 살해한다고 한다.’ 그다음 칼은 분노에 휩싸인 윤아가 미군을 찌르고, 미군이 다시 윤아를 찌르려다가 막아선 엄마의 얼굴을 그어버린 칼로 등장한다. 칼을 높이 쳐들고 엄마는 윤아를 대신해서 자수한다. 한편, 알란은 칼을 이용해서 고국의 요리를 만들어 윤아한테 대접한다. 윤아의 생일날 알란이 선물한 것이 바로 ‘사라센의 칼’이다. 앞으로 윤아를 지켜줄 거라는 말을 하지만, 결국 그 칼에 찔려서 죽고 만다. 알란이 피살되고 나서 윤아는 공장을 나온다. 언덕바지로 올라서면서 마음속 장면이 펼쳐진다. 낡은 베틀에서 천을 짜는 엄마, 엄마를 올려다보던 어린 자신. 무명천이 가득 널려있는 빨랫줄. 그 아래에서 윤아는 춤사위를 하듯 칼과 함께 있다. 마지막에 등장한 칼은 사라센의 칼이 아니다. 손잡이가 천으로 친친 동여매어 있다. 손아귀가 아리도록 단단히 쓸 작정이다. 햇발이 칼날에 부딪혀 광채를 뿜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웃트로. ‘크나큰 슬픔을 가진 어미 낙타는 아무리 먼 길을 가도 새끼 낙타를 그리워하며 찾아오기 때문이다.’



스스로 새끼 낙타가 되어 죽은 알란이 있다. 이제 우리가 어미 낙타가 될 법하지 않은가? 씨줄 날줄을 잘 드리워서 반듯한 베를 짜듯, 우리 사회는 부디 성숙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는 잠든 양심을 아프도록 강하게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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