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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반파국, 가야 봉화 복원되다

봉화왕국 반파국, 백제와 봉후(화)로 3년 전쟁
가야 봉화대 구조, 봉화대와 봉화시설, 봉화구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11월 29일 14시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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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장근(교수,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소장)



1980년대 후반 필자는 봉화산과 첫 인연을 맺었다.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에서 유적을 찾는 지표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 봉화산의 존재를 확인했다. 1990년대 백두대간 서쪽 진안고원 지표조사에서도 다수의 봉화산 존재를 재확인하고 봉화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1996년 군산대학교 사학과가 신설된 뒤 곧바로 봉화의 긴잠을 깨우는 현지조사에 돌입했다.

이제까지의 지표조사를 통해 전북 동부지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봉화는 110여 개소에 달한다. 너무 봉화가 많다는 학계의 우려도 있지만 그 수가 더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여덟 갈래 봉화로의 출발지와 종착지가 전북 동부지역에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사 국정과제로 3개소의 봉화산을 중심으로 학술발굴이 시작되어 봉화대의 구조가 상당부분 복원됐다.

당시 봉화를 올리던 봉화대는 대부분 장방형으로 그 위치와 축조 재료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인다. 본래 반파국 영역이었던 장수군과 무주군 안성면, 진안군 동향면 일대 봉화대는 그 크기가 다른 흑운모 편마암을 가지고 거칠게 쌓았다. 최근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가야토기가 나온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봉화봉의 경우만 화강 편마암으로 봉화대의 벽석이 상당히 두껍다.

웅진 천도 이후 백제가 한동안 정치 불안에 빠지자 반파국이 전북 진안군과 충남 금산군 일대로 진출하여 봉화망을 구축했다. 봉화대는 대부분 편마암으로 쌓았는데, 장수군 봉화대보다 벽석이 더 정교하게 축조됐다. 봉화산과 봉화골, 봉우재, 봉우재봉 등의 지명이 봉화의 존재를 알렸다. 진안 봉우재봉 등 국경 혹은 전략상 요충지에 배치된 봉화는 테뫼식 성벽을 둘렀다.

반파국 최전성기에는 금남정맥을 넘어 만경강 유역으로 진출했던 것 같다. 완주군 동북부에 집중 배치된 봉화대는 완주 운암산 봉화대를 제외하면 모두 흑운모 편마암으로 쌓았다. 장방형 봉화대의 벽석은 두께가 얇은 할석을 가지고 쌓은 뒤 벽석과 벽석 사이에는 소형 할석으로 메꾸었다. 완주 종리·용복리 산성 등 성벽에 봉화시설을 배치하여 강한 지역성도 확인됐다.

섬진강 유역 봉화대는 대부분 거칠고 조잡하게 쌓았다. 자연 암반을 평탄하게 다듬은 진안 서비산과 순창 채개산 봉화대를 제외하면 흙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임실 봉화산 학술발굴에서 영정주와 함께 남쪽 기슭에서 봉화군이 생활하던 주거공간도 발견됐다. 임실 치마산과 순창 생이봉에서 석축 봉화대도 일부 확인됐지만 그 축조기법은 대단히 엉성하다.

봉화대의 축조기법과 재료에서 큰 차이를 보인 것은 백제와 반파국의 역학관계에서 기인한다. 백제가 일시에 혼란에 빠지자 반파국이 백제 영역으로 진출을 감행했고, 최전성기에는 금남정맥을 넘어 만경강 유역 백제의 철산지를 영역화했다. 만경강 유역 심장부에 위치한 고성산은 성벽의 축조기법이 봉화대의 벽석과 똑같아 반파국의 진출을 방증해 주었다.

봉화를 올리던 봉화시설과 봉화구는 모두 한 개소이다. 봉화대 중앙부에 배치된 봉화시설과 봉화구는 그 평면형태가 원형에서 전방후원형으로 변화한다. 아직까지 만경강 유역에서 봉화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봉화시설은 2매의 장대형 석재를 10cm 내외의 간격으로 나란히 놓고 그 주변을 원형으로 둘렀다. 섬진강 유역에서만 전방후원형의 봉화시설과 봉화구가 모두 병존한다.

반파국의 위치 비정은 역사고고학의 범주에 속한다. 문헌의 내용이 유적과 유물로 입증되지 않는다면 학계의 논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반파국은 백제와 3년 동안 전쟁을 치를 때 봉후(화)제를 이용했고, 신라와도 적대 관계를 초래했다. 따라서 가야의 봉화 존재와 함께 봉화로가 복원되어야 하는데 금강 최상류 장수군에 기반을 둔 가야세력은 문헌의 내용을 모두 충족시켰다.

전북 동부지역 가야 봉화대 학술발굴에서 6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삼국시대 토기편만 출토됐다. 이제껏 가야 봉화에서 고려 청자편과 조선 백자편이 나오지 않았다. 남원 봉화산과 임실 봉화산에서는 가야토기편이 출토됐는데, 후자는 장수 삼고리 고분군 출토품과 그 속성이 일맥상통한다. 가야 봉화대 출토품을 근거로 그 운영 시기를 가야 봉화로 비정했음을 밝혀둔다.

끝으로 봉화는 국가의 존재와 국가의 영역과 국가의 국력을 대변한다. 전북 동부지역 봉화의 역사성과 완전성을 고증하기 위해 전북 가야의 영역에서만 230여 개소의 제철유적을 새롭게 찾았다. 아직은 가야사 국정과제로 제철유적의 분포양상만 파악됐기 때문에 향후 반파국과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한 학제 간 또는 지역 간 융복합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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