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온누리]김장 나눔

기사 작성: 박은희 - 2025년 12월 01일 15시45분

겨울 바람이 매서워질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풍경이 있다. 아파트 화단에 배추 상자가 쌓이고, 골목 어귀마다 양념 냄새가 은근히 흘러나오는 장면이다. 바로 ‘김장’의 계절이다. 각자 바쁘고 사람 사이 거리가 멀어졌다고 말하는 시대지만, 이상하게도 김장만큼은 우리를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힘이 있다.

며칠 전, 봉사단의 일원으로 복지관의 김장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새벽부터 모여든 주민들이 서툰 장갑을 끼고 배추를 뒤집고 양념을 버무리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양념 더 드릴까요?” “이 포기 참 잘 절였네요” 하고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그중에는 서로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배추 한 포기를 넘기는 순간만큼은 오래된 이웃처럼 어깨가 맞닿았다. 김장이 주는 마법 같은 장면이었다.

그날 만들어진 김치는 인근의 독거 어르신에게 배달됐다. 배달을 맡은 자원봉사자는 “고맙다는 말보다 따뜻한 눈빛이 더 오래 남는다”고 했다. 어떤 어르신은 김치통 뚜껑을 열어 보곤 “이렇게 양념이 꽉 찬 김치는 몇 년 만이네”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김치 한 통이 그들에게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올겨울에도 당신을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조용한 안부였다.

사실 김장은 참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배추 절이는 시간, 무채를 써는 노동, 양념을 버무리며 생기는 잔손까지. 그래서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고, 그렇기에 함께할 때 더 깊은 의미가 생긴다. 누군가의 허리를 대신 펴주고, 양념 한 국자 더 떠주는 마음이 배추 잎 사이사이에 배어든다. 그 정성이 발효돼 겨울 내내 식탁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김장이 단지 행사를 넘어 지역을 잇는 사회적 연대의 장으로 자리 잡고 단순한 전통을 넘어 현대판 돌봄의 방식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장철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묻게 된다. ‘올해 나는 누구의 겨울을 조금이라도 덜 춥게 해줄 수 있을까?’ 배추 몇 포기, 김치통 몇 개가 세상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마음을 건네는 일에는 그리 큰 것이 필요하지 않다. 김치 한 통이 전하는 따뜻함은 겨울의 찬 바람보다 오래 남는다.

어쩌면 우리는 김장을 통해 작은 공동체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겨울을 건너는 힘이 되어주는 일, 그것이 바로 김치 한 포기의 힘이다. 올해 김장철에는 한 통의 김치라도 더 이웃과 나눌 수 있다면, 그 겨울은 훨씬 덜 춥고, 훨씬 더 따뜻해질 것이다.

/정금성(지역활성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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