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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류 화가의 속 깊은 풍류

김스미의 미술산책〈68〉 허산옥 ‘배추’, ‘화조도’

인생 후반기의 낭만과 여유가 흠뻑 묻어나고
깊은 봄날에 활짝 핀 묵모란의 과감한 붓질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9월 03일 12시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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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 사는 이가 대체 몇이나 될까? 어려운 환경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라도 반전의 서사가 있어 흥미진진한 것이 인생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가사의한 욕구를 해독하여 진지한 실험을 한 사람의 흔적은 오래도록 짙은 여운이 남는다. 이 향기를 품은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방법론적 향유가 짙게 드리워져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우라의 품격이 남다르다.

전주에서 활동한 화가 람전(藍田) 허산옥(1924-1993)의 멋진 작품 앞에 서니 가슴 한편이 훈훈해진다. 일제강점기 소위 예능인들의 시조 격인 권번(券番)이라는 기생양성소가 있었다. 본명이 허귀옥, 람전은 가난 때문에 1940년 남원 권번에 입소하였고, 산옥(山玉)이란 이름으로 1943년 전주 권번에서 기생살이를 한다. 1945년 해방 후 권번 제도가 폐지되어 자유인이 된 람전은 옛 권번 자리인 일본식 한옥을 인수하여 행원(杏苑)이라 한다. 요정(한정식집) 행원은 수많은 풍류 묵객들의 아지트가 되고 허산옥은 전주 문화 예술 살롱의 마돈나가 되었다.

람전은 동광미술연구소, 효산 이광열(1885-1966)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남도 묵향의 원조 의제 허백련(1891-1977)의 문하생이 된다. 고암 이응노, 변관식, 청전 이상범, 이당 김은호 등 당대 스타 화가들과 교류하며 가난한 예술가들의 후원했다 하니 람전의 인간 됨의 사이즈를 가늠할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작가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컬러풀한 색채에서 느껴지는 람전의 활달하고 대범한 취향이 그렇고, 부드러운 듯 강인한 선묘의 붓놀림엔 노련한 화가의 풍류가 깊이 배어 난다.



작품 제목이 ‘배추’다. 고고한 선비들의 문인화에서는 등장하기 어려운 배추를 중심에 놓았으니 경계 없이 자유롭다. 큰 국화와 소국이 어우러지고, 빨간 찔레꽃 열매에 잘 익은 감, 표고버섯이 세 개다. 람전은 생활이 곧 풍류였고 풍류가 삶의 전부였다. 인생 후반기의 낭만이 흠뻑 묻어나고 흥건한 여유가 농익었다. 만선의 기쁨을 싣고 돌아오는 어부의 노래처럼 그의 말년은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풍요로웠나 보다. 꽃과 채소라는 소재도 특별하고, 연분홍 국화 두 송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 살랑거린다. 온화하고 감각적인 채색의 조화가 짙은 먹의 정점과 어우러져 담담함을 털어내니 바라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람전의 화조도에는 이야기들이 풍성하다. 장미와 동백, 모란, 난초, 감, 포도, 호리병 등 다양한 소재로 확장시킨 채색문인화는 람전만의 독특한 소재와 취향의 어울림으로 당당한 자신의 삶을 대변한다. 담백하게 툭툭 치듯 노련한 붓 터치는 본질적인 것만 전달하는 형식의 마법이다.

1982년 화조도는 이런 람전의 마음이 잘 읽어지는 작품이다. 깊은 봄날에 활짝 핀 묵모란의 과감한 붓질, 고혹적인 혹은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분위기의 검은 모란은 작가 자신이다. 화려하고 붉은 모란과의 대비와 배치가 현란하다. 단단한 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피었다. 산새 두 마리도 힘찬 몸짓으로 입을 쩍 벌리고 지저귄다. 람전의 여장부다운 기질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시대적 절망과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의 편견을 견디며 여성 화가로서 화단의 편 가르기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굳건하게 이어간 허산옥, 자신을 꼭 닮은 그림들이 남아 후배들을 깨우친다. 그를 다시 조명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으니 람전의 작품도 날개를 달고 활짝 웃을 날만 남았다./화가, 칼럼니스트 김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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