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동학, 동학농민혁명사]서장옥(徐璋玉, 1852-1900), 교조신원운동의 거목으로 우뚝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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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서장옥을 다룬 두 권의 책. 아래: 서장옥 사형판결선고서(1900))



수운 최제우(1824-1864)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1892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2년여에 걸쳐 충청도 공주에서 시작하여 전라도 삼례와 서울 광화문을 거쳐 다시 충청도 보은까지 이어진 동학 교단의 대규모 청원운동을 일러 교조신원운동(敎祖伸&;運動) 또는 대선생신원운동(大先生伸&;運動)이라 한다. 교조신원운동은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경국대전』(經國大典)「형전」(刑典)에 나오는 ‘신소’(伸訴) 조항에 근거한 합법적 청원운동이었던 바, ‘교조의 신원’ 즉 동학을 공인받기 위한 운동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끝까지 선두에서 이끈 지도자가 바로 서장옥이었다. 서장옥에 관한 기존 연구는 그를 ‘승려 출신’이라고 하거나 ‘서장옥의 제자가 전봉준’이라거나 또는 ‘남접(南接)의 우두머리’라는 식으로 설명을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이 글에서는 1차 사료에 근거하여 서장옥의 행적을 복원하고자 한다.

「판결선고서」에 따르면, 서장옥은 1852년 충청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해(一海)이며 일명 서인주(徐仁周)라고도 한다.『동학도종역사』에서는 장옥이 자(字)라고 나온다.「판결선고서」외에 서장옥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젊은 시절 서장옥이 어떻게 사상 형성을 하고, 사회적 관계망은 어떤 식으로 형성해 왔는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동학 입도 당시 상황에서 추론하면, 충청도 청주와 보은 등이 그의 주된 활동 무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1883년에 서장옥이 단양(丹陽)에 은거하고 있던 해월을 찾아갈 때 청주의 손천민과 손병희, 보은의 황하일 등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며, 1893년 3월 보은집회에 즈음하여 동학의 지역 단위 조직인 포제(包制)가 시행될 때 서장옥이 서호(西湖; 西湖는 湖西의 별칭-주) 대접주였다는 사실 등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해월선생문집』(1906)과 같은 동학 초기 기록에 따르면, 32세의 서장옥이 해월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한 것은 1883년 3월이며, 이듬해에는 수운의 조난기념예식(遭難記念禮式)에 참여하고, 장인인 음선장(陰善長)에게도 동학을 전했다.(「음선장판결선고서」) 이처럼, 입도 직후부터 동학의 각종 신행(信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서장옥은 1885년 2월에는 보은 장내에 해월의 첫째 부인 밀양손씨(密陽孫氏)의 거처를 마련하는 등 ‘유무상자’(有無相資) 실천에도 앞장을 섰다. 이로써 서장옥에게 일정 정도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동학 초기부터 강조되어온 ‘유무상자’의 전통이 단절되는 일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5년 6월, 충청감사 심상훈(沈相薰)과 단양군수 최희진(崔喜鎭)이 동학에 대해 일대 탄압을 가했다. 동학의 역사에 ‘을유지영액’(乙酉之營厄)이라 기록된 이 탄압으로 인해 차도주(次道主) 강시원(姜時元)과 이경교&;김성집 등 3인이 체포되었으며, 해월과 그 가족들은 10여 년 은거해 왔던 단양 송두둑을 떠나 보은 장내, 영천 반부장대, 영천 화계동을 거쳐 9월에 가서야 경상도 상주(尙州) 화령의 전성촌(前城村)에 안착한다. 바로 이 고난의 시기, 즉 해월이 단양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전성촌에 안착할 무렵에 해월과 그 가족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은 전적으로 서장옥과 그의 절친 황하일이 맡았으며, 한편으로 서장옥은 손천민(청주)&;권병덕(청주)&;황하일(보은)&;박치경(전라도 고산) 등과 함께 해월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동학의 중견 지도자로서 성장해 갔다.

1887년 1월, 해월의 장남 최덕기(崔德基)가 청주 음선장(陰善長)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이때 이미 서장옥은 음선장의 첫째 딸과 결혼한 사이였으므로 서장옥과 최덕기는 동서(同壻) 사이가 됨으로써 서장옥은 해월의 인척(姻戚)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에 서장옥은 태백산 갈래사(葛來寺;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淨岩寺-주)에서 해월을 모시고 손천민과 함께 49일 수련을 마침으로써 동학을 널리 전하고 도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유택하수기」)

1889년 동학은 다시 관(官)의 탄압에 직면했다. 그해 10월 28일, 서장옥은 강한형&;신정엽&;정현섭 등과 함께 서울에서 체포되어(1차 체포), 강한형과 정현섭은 서울에서 처형되고 서장옥과 신정엽은 절도정배(絶島定配; 육지에서 먼 섬으로 귀양 보냄-주)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1890년) 8월에 서장옥은 해월이 보석금을 마련해 준 덕분에 석방된다. 그런데 서장옥의 석방이 확정되기 전에 해월은 “비록 보석으로 풀려난다고는 하지만 그의 생사를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매 식후에 하늘에 고하여 서장옥의 무사 생환을 빌고자 하니 그대들도 그렇게 하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서장옥에 대한 해월의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한다.



동희(東曦; 해월과 밀양손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주) 나던 해 (1890년-주)에 강원도로부터 돌아오시다가 중로(中路)에서 비를 맞아 의복이 몹시 젖었으되 마른 옷을 갈아입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서장옥이 지 목(指目)으로 수감(囚監)되어 있는데 내 어찌 집에 편안히 있으리요” 하시고 젖은 옷으로 그냥 밤을 새었습니다. 그리고 서장옥이 재감시(在監時)에는 꼭 이불(衾) 을 덮지 아니하시고 주무셨습니다.

(「해월신사 일상생활」,『천도교회월보』165, 1924년 6월호, 5쪽)



해월은 또한 “내가 서인주(서장옥-주)가 있은 뒤로 배운 것이 참 많았다. 강직하도다. 이 사람이여! 일에 밝고도 분명하도다. 이 사람이여!”(自吾有徐仁周後 所學者多矣 剛直哉斯人 明白哉斯人)라는 찬사를 남긴 바 있다.(「동학도종역사」,『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1,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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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옥에 대한 해월의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는 일화가 실린 글



1890년 8월경에 보석으로 석방된 서장옥이 다시 동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2년 뒤인 1892년이다. 1892년 7월, 서장옥은 경상도 상주 왕실(旺室)에 은거하고 있던 해월을 찾아가 ‘교조신원’(敎祖伸&;) 즉 동학을 공인(公認)받는 청원운동을 시작할 것을 건의하였다.(『해월선생문집』) ‘을유지영액’으로 표현된 1885년의 탄압, ‘기축지원왕’(己丑之寃枉)으로 표현된 1889년의 탄압, 그리고 1892년 충청감사 조병식과 공주 영장 윤영기에 의한 탄압 등에 시달리는 등 거듭되는 수난에 희생당하는 동학 교도들의 생명과 생업을 안보(安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조신원’ 즉 조선왕조로부터 동학을 공인받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장옥 등의 건의에 대해 해월은 처음에는 만류하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탄압에 시달리는 교도들의 빗발치는 요구를 대변하는 서장옥 등의 건의를 받아들인 해월은 1892년 10월 17일 ‘교조 수운 최제우의 신원이라는 대의에 동참하라’는 요지의「입의통문」(立義通文)을 발송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것을 허락하였다.(『해월문집』속의 1892년 10월 17일자 「입의통문」) 이로써, 스승 해월의 공식적 승인을 얻은 교조신원운동은 서장옥이 주도하다시피 하였다. 1892년 10월부터 1893년 4월까지 2년여에 걸친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서장옥이 수행한 역할은 지대(至大)하였다. 특히,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 때 서장옥이 전주 영장(營將) 김시풍(金時豊) 앞에서 “너희 관리들이 우리 도인들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며 사람을 죽이므로 억울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의송(議訟; 청원)을 제기한 것이지 어찌 민심을 현혹한 일이란 말인가? (중략) 칼 받기야 어렵지 않으니 칠 테면 쳐라!”라며 의연한 태도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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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집회 당시 서장옥이 등장하는 장면이 실린 『남원군 동학사』(1924)



서장옥은 1893년 3월의 보은집회에 즈음하여 조정으로부터 주동자로 지목되어 두 번째 체포되는 불운을 당했다. 그리하여 제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옥중에 있었다. 그가 풀려난 것은 1894년 6월 말이었다. (『한국동학당봉기일건』) 1900년에 세 번째 체포된 서장옥은 교수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교조신원운동의 거목다운 ‘거룩한’ 죽음이었다.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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