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메나르적 상상의 미로

[책마주보기]'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이지혜)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4월 07일 08시23분

아르헨티나의 문학가 보르헤스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저작을 발표하며 20세기 후반의 패러다임을 선도한다. 그가 제시한 비현실 같은 소설 속의 이야기는 문학의 공간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거나 사유의 진보를 배양한다. 이는 기존의 진리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던 것들이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허구라는 회의적 인식에서 시작된다.

보르헤스는 문학이 주는 많은 즐거움 중 최고의 것은 상상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끄는 상상의 세계에서는 무수한 의미의 갈래가 만들어진다. 사실 확증의 대명사인 백과사전에 허구의 가설을 입히는가 하면, 인간이라 믿었던 자신이 누군가의 꿈이 투영된 환영이었음을 암시함으로써 영혼의 폐허를 그려내기도 한다. 보르헤스의 상상은 허구를 위한 허구가 아닌, 가상과 실제 사이에서 변화하는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 새로운 관점은 현실의 허구성 혹은 허구의 현실성이라는 모호성을 배면한다.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보르헤스 문학의 핵심이 다름 아닌 미로 개념으로 집약되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혼돈과 무질서의 미로 이미지는 우주 앞에 선 유한한 인간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한다. 현실 속 비현실을 보여주는 미로를 통해 가변하는 인간세계란 상대성으로 점철된 미로임을 상기시킨다. 보르헤스의 인물들은 미로의 여정 속에서 현실과 허구의 구별을 해체한다. 이들은 여행의 끝에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찾고 있던 의미의 중심에 이르러 삶의 의문들을 밝혀줄 절대적 진리가 드러나기를 원하지만, 결국 베일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이렇듯 진리의 절대성, 근원과 중심에 대한 해체는 보르헤스 사상의 근간이 되어 이후 탈구조주의와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보르헤스에게 창작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재생산 또는 재활용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말할 것이 남아있는가와 관련 있으며 작가의 작품성을 풍부하게 하는 재료이다. 특히 이 단편집에 수록된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작품은 문학적 상상의 세계를 확장하면서 메나르적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피에르 메나르라는 가상의 작가를 고안해 낸 보르헤스는 17세기에 쓰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부활시킨다. 기존 텍스트를 통해 또 다른 텍스트를 창조해내는 그의 상상력은 현실과 허구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면서 의미를 깊고 풍요롭게 한다.

독서를 글 쓰는 행위에 비유한 보르헤스는 선대 작품을 읽는 작가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재생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독자와 작가의 경계를 허문다. 이전의 텍스트를 토대로 새로운 산물을 만드는 예술은 옛것과 겹쳐지면서도 더 복잡한 상상의 미로를 보여준다. 실제와 가상이 혼재하는 오늘, 보르헤스를 소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의 상상이 주는 신선한 충격 이면에 가려진 세계의 다원성을 발견하고, 아직 읽히지 않은 다른 측면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은 보르헤스 문학 읽기의 코드라 하겠다.

이지혜 작가는

'미당문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했다.‘나주디카시’ 대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부안독서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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