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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속 클래식]........그림 속 클래식 vol.3 낭만

고흐와 슈베르트 / 예술가와 그 곁의 사람들


“이제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스스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당신이 어떻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 했는지”
돈 맥클린(Don Mclean)의 빈센트(Vincent) 中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7월 29일 16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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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비참하고 곤궁한 현실 속에도 끊임없이 화폭에 세상을 담았다. 투박하고 거친 성격탓에 주변 사람들과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고 가족에게마저 외면 받았다. 가난한 이웃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지만 마을에서 광인 취급을 받으며 더욱 세상과 단절되어갔다. 갈구하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몇몇의 연인과도 절망적인 이별을 했다. 빈곤한 처지에 의지했던 압생트(Absinthe)가 주는 환각은 그만의 색채를 캔버스에 남기게 했지만 나날히 그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고 이제 자신마저도 어쩔 수 없게 된 광기는 스스로 귀를 자르고 권총으로 심장을 겨누게 했다. 그는 바로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이다.

그 누구보다 외롭고 비극적인 삶은 살았던 그였지만 절대 붓을 놓지 않았다. 끝없는 삶의 삐걱거림 속에서도 생명과도 같은 붓과 물감, 캔버스에 의지해 한결같이 자신을 품어주는 자연 풍경을 그렸고 애정을 담아 자신처럼 딱한 군상을 그렸다. 곁에 남은 몇 안되는 친구들을 그렸고 거울 속 마주 앉은 자신을 그렸다. 투박한 그림 실력 때문인지 생전 그림이 도통 팔리지도, 유명해지지도 못했다. 죽기 직전 팔린 그림은 딱 한 점 이었고 ‘환상적인 에너지와 격정적인 도취를 보여주는 외톨이 화가’로 이제 겨우 사람들에게서 회자될 무렵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세상과의 괴리를 겪는 집안의 골칫거리 첫째 형 고흐의 곁에는 다행히도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가 있었다. 테오는 미숙한 무명화가인 형 고흐에게 끝없이 사랑과 온정을 베풀었다. 형의 곁에 머물며 용기와 영감을 주었고 생활인으로의 능력이 전혀 없던 형을 위해 한 평생 지원하였다. 형제는 평생 700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예술과 삶을 나눴다. 고흐는 편지를 통해 일상과 순간순간의 감정들을 시시콜콜 동생에게 전하고 동생 테오는 그런 형을 애써 달래고 격려했다. 고흐는 나날히 쌓여가는 동생의 후원을 큰 빚으로 여기며 괴로워했고 이를 갚기 위해 부지런히 800여 작품을 남겼다. 이 세상 고흐를 이해 할 수 있었던 단 한 사람 테오. 고흐는 결국 테오의 품 안에서 세상을 떠나고 테오는 미안함과 우울증에 괴로워하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두 형제는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 나란히 묻혔고 이 곳은 미술애호가들의 성지가 되었다.

이름없는 들꽃처럼 잊혀질 수 밖에 없었던 고흐지만 우리에게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테오의 부인 요한나-반 고흐 봉허(Johanna van Gogh-Bonger) 덕분이다.

두 형제의 사후, 요한나는 자신에게 남겨진 유산인 두 형제의 편지와 고흐의 작품들을 정성스레 세상에 내놓는다. 수백점에 이르는 고흐의 작품들을 빠짐없이 수습해 고생 끝에 회고전을 열었으며 두 형제의 흔적이 담겨있는 수백장의 편지도 정리해 출간한다. 요한나는 고흐와 그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일을 숙명으로 여기며 평생 이어갔고 그녀의 사후엔 아들 빈센트(테오의 아들)가 그 일을 계속했다. 두 모자의 노력은 반 고흐 미술관(네덜란드)의 건립으로 결실을 맺는다. 현재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한명인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작품이 현재와 같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고흐의 곁에 있던 가족, 테오와 요한나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하겠다.











*슈베르트와 슈베르티아데

고흐 못지 않게 곤궁한 삶을 살았던 음악가가 있다. 고흐보다 약 50여년 앞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고흐처럼 짧은 생을 살았으며 ‘마왕’, ‘보리수’, ‘송어’ 등 약 600여편의 가곡을 필두로 1000여곡의 보석같은 음악을 남겼다. 리트(Lied, 독일예술가곡)의 창시자이며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작곡가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이다.

하이든이 포문을 열고 모차르트를 거쳐 베토벤이 완성한 고전파 음악은 슈베르트를 통해 낭만파 음악으로 그 왕좌를 넘겨준다. 낭만주의 시대엔 엄격한 고전의 틀을 벗어나 보다 새롭고 개성있는 곡 들이 늘어났고 보다 내밀한 개인의 감정이 작품 표면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는 슈베르트의 예술가곡에서 극대화되었는데 시어(詩語)가 갖는 세밀한 감정과 내용이 음악과 절묘히 결합되어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슈베르트는 31년의 짧은 생애동안 가곡 뿐 아니라 교향곡, 실내악, 기악곡 등 약 천여곡을 남긴 정력적인 작곡가였지만 성격은 매우 여린 사람이었다. 156cm 단신으로 지독한 근시였고 매우 내성적이었으며 자주 술에 의지했고 그럴때면 매우 난폭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한 음악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슈베르트는 그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친구들 중엔 ‘쇼베르트’라 불렸던 평생의 친구 쇼버와 화가 슈빈트를 비롯해 법률가 슈파운, 시인 마일호퍼, 성악가 포글 등이 있었으며 그들은 ‘슈베르트의 밤’이란 뜻의 모임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를 결성했다. 그들은 가난한 친구, 슈베르트에게 거처를 내주고,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팔리지 않는 악보를 몰래 구입해주었던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또한 거의 매일 밤 함께 모여 시를 낭독하고 문학과 미술에 대해 토론을 하고 막 작곡된 슈베르트의 음악에 한껏 심취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를 신봉하던 신지식인들의 모임이었던 슈베르티아데는 점점 더 삼엄해지는 메테르니히 정부의 감시에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비록 슈베르티아데의 행복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슈베르트가 영감을 얻고 인정을 받으며 힘을 내 수많은 곡을 작곡하고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친구들, ‘슈베르티아데’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에서 수많은 음악회와 음악축제가 슈베르티아데라는 이름으로 열리며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슈베르트의 음악을 감상한다. 슈베르트가 이처럼 인류에 사랑받는 음악가로 거듭난 것을 그의 친구들이 하늘에서 본다면 얼마나 놀라고 흐뭇해 할까.

오늘은 예술가보다 그들의 예술혼이 쉬 사그러들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었던 가족과 친구들을 기억하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글 / 이주용 (전주대학교 음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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