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금요수필] 엄마의 유언

정남숙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5월 02일 09시30분

"언니! 엄마기일 지나야 귀국할 것 같아 어쩌지?” 만화방창 호시절 5월 15일, 엄마의 기일이다. 20여 년째,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5남 5녀 10남매 중 막내의 전화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모두가 야속했다. 막내는 외국이라 여건이 맞지 않아 기일에 맞춰 오지 못할 뿐이니 이해가 됐지만, 국내에 있는 남매들은 사정들이 있어 하나같이 엄마 기일에 아예 참석을 못 할 것 같다 한다.

엄마는, 내가 40여 년을 서울에서 살다가 귀향한 지 2년 후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노환으로 누우신 지 보름이 다 돼가는 동안 날마다 엄마를 만나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만일 내가 서울에 살고 있었다면 병환 소식 듣고 한두 번 뵈었을 뿐이고, 돌아가신 후에야 허겁지겁 달려왔을 텐데, 엄마 곁에서 임종을 지켜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엄마 떠나신 날은 왠지 새벽 일찍 눈이 떠져, 곧바로 엄마에게 달려갔다. 곁을 지키고 있던 막둥이 둘이 꼬박 밤을 지세우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니 동생들은, 엄마가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말도 못 한다고 한다. 나는 엄마 곁에 앉아 엄마를 부르니 눈을 뜨고 반기신다. 내 이름을 부르시며 나를 알아보신다. 작은 소리로 유언을 남기신 잠시 후, 내 손을 잡으신 채 그대로 영면하셨다. 평소 형제들의 불화를 염려하셨으니 그네들의 화목을 내게 부탁하신 것이다.

첫 기일이 지난 후, 해마다 돌아오는 엄마 기일에 자식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한둘 빠지더니, 10여 년이 지나니 아예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다. 그 많은 형제자매 중 엄마를 모셨던 동생과 단둘이, 엄마 영정사진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섭섭한 맘을 삭이다가 엄마의 기일만이라도 함께 모일 방법을 찾기로 했다. 늦었지만 엄마의 유언을 지켜드리고 싶었다. 막내 귀국하기만 기다렸다. 우선 5자매부터 마음을 모아 돈독한 우정을 나눌 계획을 세웠다. 막내가 귀국하자 무리인 줄 알면서도 계획은 현실이 되어, 첫 번째 국내 여행이 진행됐다. 숱한 사연을 겪은 후, 일정을 정해 생전 처음 우리 5자매만의 나들이가 시작됐다.

우리 자매들은 유별나게 개성들이 강하고, 거꾸로 똑똑이 순이다. 둘째인 내 의견을 순순히 따라서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염려도 앞섰지만, 모처럼 떠나는 여행이라 타임머신을 타고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었고, 고향 시골 생활의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니, 큰언니와 막내의 23년 터울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계획과 비용, 장소선택까지도 내 몫이었지만, 엄마의 유언을 이뤄드림에 조금도 귀찮거나 아깝지 않았다. 나는 안전운전에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뒷자리에서 웃고 떠드는 바람에 진입로를 놓쳐 멀리 돌아야 했고, 과속 딱지도 떼었지만, 2박 3일 예정이 아쉬워, 3박 4일을 보낸 것은, 엄마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 엄마 기일에 막내가 귀국하면, 또다시 우리 다섯 자매 여행계획을 세워 봐야겠다. 기뻐하실 엄마의 보고픈 얼굴이 떠오른다.

정남숙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등단

수필집: ‘노을을 닮고 싶다’ ‘난 아직도 꿈을 꾼다', ‘역사의 마당에서 전통이랑 놀아보자’

'대한문학 작가상’, ‘올해의 수필인 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선정, ‘올해의 수필인 상’ 수상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 행촌수필, 은빛수필 회원. 국립전주박물관, 전주기독교역사기념관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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