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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재발견]문화재돌봄 10년의 현장을 , 순창 설진영 서실

“장성에서 의병활동한 설진영 선생이 1910년 국권침탈이 되자
낙향 후 세운 서실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12월 01일 11시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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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경 미(예원예술대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카지야마 토시유키(梶山季之)는 일본 소설가로 조선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그가 본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아픔을 『이조잔영』과 『족보』라는 소설에 그렸다. 『이조잔영』은 1967년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했고 『족보』는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1978년 제17회 대종상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하명중), 제78년 영화기자상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제8회 뮌헨영화제 출품, 제11회 제3대륙영화제(낭뜨영화제) 출품한 영화이다. 임권택 감독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영화의 줄거리 즉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경기도청 총력1과에 근무하는 일본인 청년 다니(하명중 분)는 총독부의 명령에 따라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하도록 하는 작업을 지시 받는다. 다니가 찾은 곳은 설씨집안이 모여 사는 곳으로, 문중의 종손 설진영은 완강하고 강직한 조선인으로 묘사되었다. 다니는 설진영의 인간성과 그 집의 딸 옥순(한혜숙 분)의 아름다움에 끌리게 되고 설진영의 진실과 조선인의 ‘족보 정신’에 감동하여 자신의 갈등을 주체하지 못한다. 설진영의 창씨개명 거부는 딸의 약혼자를 징용에 끌려가게 하여 파혼하게 하는 동시에 아들도 그리고 귀여운 손자들까지도 그의 완강함에 돌아서게 한다. 그래서 그는 급기야 면사무소에 나가 가족 모두의 창씨 개명을 서명하고 끝내 자신만은 설진영 그대로 둔 채 돌아와 족보 마지막 장에 성씨만큼은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고 유서를 남긴 채 서실 앞 우물에 투신 자결하였다고 한다. 투신한 우물 앞에는 고인의 지팡이 의관과 시 한 수가 적힌 유서 1통이 있었다고 한다.

『족보』 영화에서는 다니가 다니는 곳은 경기도청 총력1과이고 설씨 집성촌은 수원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설정되었다. 또한 다니의 개명 요구를 거절하는 뜻으로 하인을 시켜 다니를 배웅할 때 기차를 탈 수 있도록 병점까지 나가라는 지시가 있었고 설진영이 창씨개명 신청을 하러 가는 면사무소도 수원군 일왕 면사무소로 나온다. 이로써 카지야마 토시유키는 과연 설진영선생을 만난 적이 있었는지, 또한 무대를 왜 경기도로 설정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가 경성중학교를 다녔기에 아마도 설진영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과 그가 가봤을 수원의 어는 시골 분위기 등을 기억하며 장소를 택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건 설진영선생은 1869년(고종 6년)에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에서 태어났다.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는 순창설씨의 집성촌으로 1419년 설위가 과거 급제 후 동전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설진영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고 여러 면에서 재주가 뛰어났으며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고 한다. 그의 초명은 진삼(鎭三)이었다고도 하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창(鎭昌)이었다고도 한다.(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그런데 개명하여 진영이라 하였다.

설진영선생은 1895년(고종 32년) 스승인 의병 기우만과 함께 장성에서 의병활동을 했고 1910년 국권침탈이 되자 낙향 후 이곳에 서실을 세웠다.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더불어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전라북도 진안 이산묘 영광사에 충의열사 33인과 함께 제향되었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순절한 경우는 설진영선생이 유일하여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설진영서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모두 툇마루가 있다. 처음 건립시기는 1910년이며 초가였다고 한다. 지금은 무거운 기와를 이고 있어 원형이 초가였다면 그 모습으로 되돌리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설진영 서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민도리집으로 서까래의 굵기는 제법 굵다. 정면에 모두 툇마루를 달았고 배면에 아궁이가 마련되었다. 인터넷상의 자료들은 모두 정면과 배면에 툇마루 마련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배면에는 마루가 없다. 2016년도에 터마트랙을 이용한 흰개미서식을 탐지한 결과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배면의 배수로 구축 등 목조건축물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와는 시멘트 기와였고 지붕의 내림마루 머거블이 거의 탈락되었으며 좌측면의 적세가 파손되는 등 지붕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시멘트기와였던 지붕부는 2017년도에 한식 전통기와로 변경되었다. 2018년도의 모니터링 결과 기단부 균열과 탈락이 일어났고 마루의 청판이 고르지 않았으며 건물의 좌측 담장 주변의 대나무가 웃자라 바닥면으로 대나무뿌리가 집 쪽으로 내달리고 동시에 지붕까지 맞닿아 자라는 상태이다. 따라서 전북 문화재돌봄 동부권사업단은 대나무가 더 이상 집쪽으로 뻗지 않도록 정리하였다. 2019년에 판문의 청판이 없어져 문중에서 베니어합판으로 막아 놓은 것을 전통방식의 재료와 기법으로 보수하였다. 그 외에도 담장의 넝쿨제거, 소화기와 CC회로 점검, 안내판 청소, 실내외 청소, 내부 도배작업, 마루 들기름칠 등도 매번 진행하고 있다.

다만 일제 강점기에 후학 양성에 온 힘을 다 쏟았고 민족사상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서실의 원래 모습이 초가였다면 초가의 지붕으로 되돌아가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창씨개명을 반대하여 우물에 빠졌다면 그 우물도 복원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곳에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우리의 역사를 배우는 장소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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