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다. 만리장성이나 앙코르와트처럼 장대함에 놀라는 일도 그렇지만, 어떤 도시가 천여 년 동안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경우도 그렇다. 요르단의 패트라나 이곳 제라쉬 역시 숨어있던 그 긴 시간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제우스 신전 기둥에 기대서서 바라보는 고대도시의 풍경, 이 풍경을 문득 달밤에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달밤에 이 무너진 도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그 달빛은 차가울까, 아니면 따뜻할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노래를 읊조렸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무너진 성전 기둥에 기대어서서 부른 노래는 <황성옛터>였다. 1928년 망국의 한을 품고 살던 왕평(본명 이호응)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해 이애리수가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이다. 고려왕조의 궁궐터 만월대에 대한 심사를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일제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던 노래를 나도 모르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제라쉬의 달밤을 보고 싶다. 교교한 달빛 아래서는 이 돌들이 모두 일어나 옛 신화를 재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우스 신전 옆에는 원형극장이 있다. 로마시대에 조성된 도시에는 반드시 원형극장을 두었다. 제라쉬에는 두 개의 극장이 있는데 북쪽극장에 비해 이곳 남쪽극장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왔다. 32개의 계단으로 구성된 객석은 관객 3000명이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요즘도 제라쉬 축제 기간에 아랍인 가수들의 공연이 벌인다고 한다.

극장 입구에 들어서자 아랍 전통 복장을 입은 악사들이 반겨 맞는다. 그리고는 북을 치며 백파이프를 연주한다. 이 극장은 지금도 음악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 온다. 비밀은 관객석 아래에 있는 접시 모양의 울림판에 있다고 이조형 소장이 알려준다. 실제 그런가 실험해보자고 극장의 양쪽 끝에 서서 작은 소리로 대화를 시도했다. 돌을 깎아 만든 울림판이 연결돼 그대로 소리가 전해온다. 그래서 여기서 악기를 연주하면 서라운드 시스템처럼 울리는 것이다. 로마의 힘과 기술, 그리고 문화의 역량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백파이프일까? 아랍 전통의 우드나 리바브 같은 악기를 연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유는 간단했다. 백파이프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악기이다. 그러니까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탓이라는 것이다. 영국식으로 홍차를 즐겨 마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 다른 아랍 국가들에 비해 이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하는 이유도 아마 그럴 것이다.

악사들의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었다. 그랬더니 악사들이 자기들 옆에 서서 사진을 찍으라고 부른다. 모두 팁의 힘이다. 이들은 관광객들의 팁으로 연명한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극장에 걸맞는 연주에 즐겁고, 저들은 팁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 아닐까? 극장을 돌아 나오는데 한 중국 아가씨가 <첨밀밀(甛蜜蜜)>을 부른다. 중국 노래는 고음이어서 멀리까지 들린다. 봄빛 짙은 제라쉬의 하늘로 울리는 노래가 아지랑이처럼 느껴졌다. 되찾은 고대도시의 극장에서 목청껏 자기 나라 노래를 부르는, 그래서 악사들마저 침묵하게 만든 저 중국 아가씨의 노래가 마치 잠을 깨고 다시 일어서는 중국의 표상처럼 다가온다.

제라쉬는 마치 이탈리아의 폼페이처럼 목욕탕도 있고, 교회도 있다. 모두 모래 속에 숨었다가 나온 것이다. 로마가 목욕탕 때문에 망했다는 말이 있듯, 당시 목욕은 호사였다. 물과 불이 엄청나게 소모되는 시설이다. 그러려니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은 필수였다. 여기에 아랍의 모자이크 기술까지 더해져 더 화려하기까지 하다. 교회가 있었던 자리에 남아 있는 모자이크는 지금 봐도 아름답다.

남쪽 테트라필로(Tetrapylon)이 나온다. 남북으로 이어진 대로 카르도와 동서로 이어진 대로 데쿠마누스가 만나는 지점이다. 제라쉬에는 이런 교차점인 테트라필로가 두 곳이 있다. 정말 화려한 사거리이다. 군데군데 횃불을 밝혔던 흔적도 보인다. 얼마나 로마의 문화가 눈부셨는가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길로 가다보니 염소떼가 지나간다. 푸른 풀과 겨자꽃이 가득한 제라쉬 동산은 이들에게 더 없이 좋은 삶의 터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서 깊은 문화재 안에 염소를 풀어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문득 몇 년 전 네팔에 갔을 때 유적지마다 누워있던 소들이 생각났다. 좀 더 문화적으로 성숙해지면 저런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북쪽에 있는 제라쉬의 수호신 아르테미스 신전에 도착했다. 제우스 신전이 제일 높은 곳에 있다면 보존 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한 아르테미스 신전은 평지에 있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과 사냥, 야생동물과 처녀성의 여신이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아폴론과는 남매지간이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달빛 아래서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때 산짐승과 초목이 춤을 춘다고 한다. 신전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 책을 읽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무척 한가해 보인다. 다시 카르도로 내려왔다. 관광객들이 계속해서 오간다.

1.5Km의 카르도를 따라 다시 포룸으로 향한다. 그 길 양쪽으로 500여 개의 돌기둥이 늘어서 있다. 가까이서 보니 이 기둥들은 생각보다 웅장하고, 화려하다. 들어올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여기서 로건과 작별을 한다. 가이드는 시간이 돈인지라 계속해서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더 남았는데 자꾸 다됐다고 우겨서 그냥 가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남문으로 나오는데 한 가족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빠와 그 뒤를 따르는 엄마 그리고 세 살쯤 된 아이, 이곳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아빠가 유모차를 맡기러 가자 엄마가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오른다. 다가가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포즈를 취한다. 활짝 웃는 해맑은 아이의 미소, 세상 어디든 아이들은 모두 예쁘다. 그러나 지금 이 아랍의 아이들 대부분이 미소를 잃었다. 척박한 사막의 삶, 그 고통에서 구하려 했던 메시아 마호메드의 뜻을 자기 방식으로 끌어가려는 자들로 갈기갈기 찢긴 땅에서 아이들의 미래는 어둡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