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원도연칼럼] 만석보 들판에 서서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3.06.30 20:14

동학농민혁명의 많은 유적지 가운데 나는 만석보를 가장 좋아한다. 물론 만석보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만석보가 있었음직한 그 자리를 기념하여 동진강 둑길 위에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예전에 가끔 답사 안내를 하다보면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일단 기념비를 보고, 무지무지 큰 안내판을 보고 그리고 사진 한방 찍고 서둘러 다음 코스로 떠나곤 했다. 과연 그럴까. 과연 이곳에서 보아야 할 것이 저 비석들 뿐일까. 나는 갈 길을 재촉하는 그들을 붙잡고 이야기해 주었다. 만석보의 진실은 저 의미 없는 비석이 아니라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배들평야라고. 저 배들평야를 보면서 갑오년 농민들의 함성을 듣고 분노를 느껴야 한다고. 저 들판 위에 쏟아졌을 농민들의 땀과 눈물을 상상할 수 없다면 답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나는 주장했었다. 문병학 시인은 이곳에 학생들을 데리고 오면 아예 그들을 들판 아래로 내려보내 들불을 놓아버린다고도 했었다. 그런 까닭에 지난 99년 그 자리에 양성우 시인의 장시 <만석보> 시비가 10여미터도 넘게 세워졌을때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시인의 시가 제아무리 뛰어난들 배들평야를 가릴 수는 없으며, 들판을 향한 사람들의 상상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아가 황토현 기념관에 갇혀있는 전봉준 동상을 이곳 들판으로 옮겨 배들평야를 호령하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전봉준 장군이라면 그 들판에 서서 찬바람 마주안고 오른 주먹 불끈 쥐고 서 있을 때 가장 행복해 할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이야말로 가장 전봉준 장군다운 것 아닌가. 그 다음에 보아야 할 것은 바로 백산이다. 만석보 둑길에서 동진강 상류를 따라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산이 바로 백산이다. 몇 년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답사길에서 나는 학생들과 함께 만석보에서 백산까지 걸어본 적이 있었다. 거의 세 시간여에 걸쳐 그 길을 걸으며 학생들은 나를 무던히 원망했다. 세 시간동안 퇴약볕 아래서 익숙치 않은 자갈길을 깃발까지 들고 걸어가면서 혁명을 기념하기란 나부터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학기가 지나고 나서 많은 학생들은 그 답사를 최고의 강의였다고 추억했다.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동학농민혁명은 반란사건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지금 그나마의 이름이라도 얻기까지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그 세월을 이기며 지금 전북땅 곳곳에는 혁명을 기념하고 유적을 보존하는 사업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 결정판으로 정읍의 황토현에는 또다른 기념관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 기념관을 채울 유물과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이 그 공간과 기념사업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의 말못할 고민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유물은 왜 꼭 기념관의 쇼케이스속에만 있어야 하는가,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유물을 굳이 만들어서라도 전시해야 하는 것일까. 없는 유물 대신한다고 자주 바꾸지도 못할 값비싼 시청각 자료만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동학농민혁명을 설명하는데는 만석보 들판에서 두 주먹 불끈 쥐고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전봉준 장군 동상 하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거기서 백산까지 땀흘리며 걸어보게 하면 그것으로 설명은 끝나지 않을까. 그러면 기념관은 뭐에 쓰냐고? 기념관이 엄숙하고 조용해야만 되나. 동학농민혁명은 가장 이땅의 농사꾼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그 방식대로 기념하자는 것이다. 구경온 사람들 잠도 재우고 황토현전투를 기념하는 전쟁놀이도 시켜주고 실컷 영화도 보게 하되, 앞마당에는 통곡의 벽처럼 그럴듯한 조형물 하나 세워서 혁명에 헌신하고 죽어간 농민들 중에 이름이 확인된 분들을 하나하나 새겨서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 하면 어떤가. 괜히 안되는 기념관 돈으로 싸서 억지로 만들어 놓다가 망월동처럼 김빠진 맥주를 만드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이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1999년 전라북도의 용역을 받아 실시되었으나, 제출하자마자 쓰레기통에 들어간 <동학농민혁명정신선양사업기본계획>에 다 나와 있는 내용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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