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금요수필]연둣빛 고요에 물들다

윤철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5월 08일 10시06분

지금은 연두의 시간이다. 1년 중 연둣빛이 가장 아름답다는 4월의 끝자락. 문득 도시의 분주함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삶의 일상이 심란할 때면 생각나는 고창의 선운사가 떠 올랐다. 선운사를 찾아가는 길, 열린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한 겹의 비단 옷자락처럼 살갗을 스친다. 길가와 중앙분리대에 늘어선 소나무들은 나를 환영하는 손을 흔들었다. 소나무 가로수가 고창을 더욱 고창답게 하는 것 같다. 봄이라 부르기엔 나무가 너무 무성하고, 여름이라고 하기엔 햇빛이 여리고 순하다. 봄이니 여름이니 하는 구분은 우리 인간들이 나눈 것일 뿐 자연은 어느 계절도 독점하지 않고 서로 교집합을 이루는 중간 어디쯤에서 자신의 삶을 색으로 그려낼 때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다.

국도만을 고집하며 달렸다. 도로의 끝에서 선운산을 등지고 앉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선운사가 나를 무심한 듯 맞이했다. 산사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마치 한 폭의 수묵화 속을 걷는 것 같다. 흙냄새, 풀 냄새, 어딘가에서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의 기척이 발걸음을 맑게 했다. 붉은 꽃무릇이 진 자리마다 연두색 잎들이 새로운 계절을 알리고 있다.

절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고요가 이마에 와 닿으며 나를 마중한다.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울어 대는 새소리는 날카롭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목소리도 나직했다. 분위기 탓일까? 대웅전 앞 만세루는 건물 전체를 삥 둘러 가림막을 치고 공사 중이었는데도 뚝딱거려야 할 망치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나무는 가만히 서서 오래된 세월의 이야기들을 속삭이듯 들려주고 있었다.

송백의 진한 향과 함께 촉촉한 흙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갈증이 일었다. 그늘에 앉아 있던 스님 한 분이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약수터를 알려주셨다. 말없이도 마음이 동화되고, 정화되는 순간이었다. 대웅전 앞에 서니, 기둥마다 묵은 시간이 배어 있다. 손끝으로 기둥을 살짝 쓸어보았다. 고요히 앉아 있던 햇살이 화들짝 놀라 비끼고, 세월의 비, 바람과 함께 수많은 사연이 쓸린다. 오래된 목조건물의 기와 위로 떨어지는 햇살은 물결처럼 일렁였고, 바람은 작은 풍경을 흔들며 나직한 염송처럼 속삭였다.

선운사 경내는 무척 단정했다. 그 정갈함 속에서 내 마음은 경건해지기보다 오히려 가볍게 날 듯 자유로워졌다. 절집이 주는 고요는 외부의 소음을 차단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소란을 잠재우는 힘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운사는 오래된 절이다. 불자도 아닌 장삼이사(張三李四)로서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절의 장엄한 역사에 압도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선운사의 유구한 세월이 내 인생의 주름과 이어지는 것 같고, 편안하다. 절집의 나무 한 그루, 기둥과 기와 하나하나가 나에게 “그동안의 인생길, 참 잘 견디고 잘 살아냈다”라며 어른의 그것처럼 내 등을 다독인다.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 나오는 길, 다시 숲길을 걸었다. 공원처럼 널찍한 빈터의 연둣빛 나뭇잎들은 생기가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당당히 하늘로 뻗어나고 있었다. 내 마음도 나를 움츠리게 하던 심란한 걱정들을 훌훌 털고 삶의 가지들을 쭉쭉 뻗고 싶어졌다.

선운사의 하루는 그렇게 내 안에 연둣빛 고요로 물들었다. 새 생명이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지향하던 그 숲길의 풍경처럼, 내 마음도 다시 피어나고 있다.

윤철 수필가는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수상 : 전북수필문학상, 새전북신문문학상, 리더스에세이문학상 등

수필집 : '칸트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 가족은 안녕한가요', '나를 닮은 타인 그 이름 가족'

(현) 전북특별자치도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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