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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새 지평을 연 남원 보절면지

보절면지 편찬위원회, ‘보절면지-보배와 절의가 숨어있는 보절 이야기’ 발간
‘보절 12승경(十二勝景)’, 처음으로 이름지어

기사 작성:  이종근
- 2021년 01월 13일 15시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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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절면지-보배와 절의가 숨어있는 보절 이야기(지은이 보절면지 편찬위원회, 출판 논형)’는 몸으로 쓴 살아있는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50여 회의 현장답사를 거친 가운데 1535인 보절면민과 500여 명의 출향인이 함께 쓴 이 이야기는 몸으로 쓴 남원시 보절면의 역사, 지리, 인류학적 보고서다.

남원시 보절면은 천황봉을 머리로 하는 만행산의 큰 품 안에 있다. 보절은 만행산의 12개의 줄기와 하천에서 흘러 내려와 12평파로 9개리와 40여 개의 마을로 형성된 곳이다. 12평파의 들판은 보절 사람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만행산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이고, 아울러 백두대간이 유라시아 대륙 곤륜연간의 한 줄기이다. 한마디로 보절은 천황봉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고장이다. 만행산의 ‘천황봉(天皇峯)’ 역사는 결코 일제 강점기에 창산개명된 것이 아니다. 천황봉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는 만동에서 살았던 매헌 소산복(梅軒 蘇山福, 1556~1620년)의 시이다.



天皇晩雲 천황봉의 저녁 구름



斗峯高抻天 머리봉이 높이 솟아 하늘에 뻗쳐 있는데,

日晩雲猶幂 날 저문 구름은 오히려 덮여 있네.

無心自去來 무심하게 스스로 오고 갈 뿐,

不礙眞容碧 푸른 참모습을 방해하지 않네.

(매헌이 노래하는 “머리봉斗峯”은 천황봉을 가리킨다. 시의 제목에 명시적으로 천황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행산 천황봉과 보절의 현대를 읊은 희당 안재직(安在稷, 1900~1961년은 이렇게 묘사한다.



登天皇峯 천황봉에 올라



穹窿拔地鎭南鄕 하늘이 땅을 뽑아 남쪽 고을을 누르니,

眼底群巒自下牀 눈 아래 뭇 산은 절로 평상보다 낮아졌네.

猿飮終愁聯臂短 원숭이 마시면서도 끝내 근심하니 비단가를 연상하고,

鳳飛應許覽輝長 봉황이 날아 화답하는 곳에 광채가 긺을 볼 수 있네.

賦台寓興孫非隱 누대에서 시를 지어 흥을 부치니 손등은 은자가 아니고,

登華示敎韓豈狂 화자강에 올라 가르침을 보이니 한강이 어찌 미쳤으랴?

多賴孤菴能答效 외로운 암자에 많이 힘입어 공로에 보답하고,

六時鍾鼓爇心香 육시를 알리는 종과 북소리에 마음의 향을 불사르네.



‘보절’이라는 지명은 1914년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보절은 백제의 중요한 군사요충지였고, 국경도시였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보절의 옛 지명인 거사물이 청웅으로, 청웅이 거령으로, 거령이 보현과 입석으로, 보현과 입석이 보현과 고절로 개명되었고, 최종적으로 보현과 고절이 합쳐져 보절이 탄생했다'(에서)

역사학의 관점에서, 승자 중심의 역사에서는 포착되지 않았던 백제의 역사를 규명하는 데도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다. 백제시대 보절은 거사물이었다. 이는 ‘신령스런 마을’을 뜻한다. 하지만 보절은 아주 슬픈 역사를 지닌 땅이다. ‘보절’은 663년 3월에 백제를 지키기 위해 거물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백제 병사들이 묻힌 곳이다. 이와 관련해서 백제의 군사 읍성이었던 거사물에 이 지역 일대를 관장하는 현청이 있었다는 주장을 새롭게 제안했다. ‘보절’이 가장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는 7세기였다. 384년에 호승 마라난타가 가지고 들어 온 불교가 대략 130여 년 만에 영광의 법성포에서 천황봉에 있는 귀정사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보절’과 ‘귀정사’가 백제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끝에 있는 지역이라는 점을 새롭게 밝혔다.

보절 역사와 이야기를 추적하면서 보절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문헌을 새롭게 발굴했다. 특히 매헌 소산복의 '매헌집'과 안재직의 '희당집'은 보절의 역사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었다. 이 문헌에 대한 번역과 주해가 시급하다. 보절면 진기리에 살았던 소재준의 문집과 그가 수집한 만 권이 넘는 서책과 서당마을의 증손 양영철이 현재 보관하고 있는 단계 양재구의 100여 권이 넘는 서책 및 각종 자료도 보절면 차원에서 관리와 보존,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또한 상신마을의 전주 이씨 문집(李可哲: 思句齋公 文集 1卷 남원시 보절면 신파리 이강수 보관, 李敎政: 農隱公 文集 2卷 보절면 신파리 이규수 보관)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보절 12승경(十二勝景)’도 처음으로 명명했다. 제1경은 만행산 천황봉, 제2경은 거령산 거물성, 내황 거사물현 성터, 제3경 바람바위와 할미바위은, 제4경은 신흥석불, 요이정, 다뫼조탑, 제5경은 보현사, 용평제, 용호정, 청류폭포, 제6경은 말무덤과 사기점, 개다리 폭포, 제7경은 삼괴정과 삼동굿놀이, 제8경은 반송정과 고인돌, 제9경은 천연기념물 281호 진기느티나무, 제10경은 다산제, 보절의 저수지, 제11경은 문류정, 호암성원, 오종문, 충렬각, 계룡산, 제12경은 구라재, 변서방터, 서정이, 갑산 등 지역마다 대표적인 명소를 선정했다.

유학(儒學) 연구의 관점에서, 보절에서 활동하던 유림이 기본적으로 사림 전통을 계승했고, 선조 시대를 중심으로 꽃피웠던 성리학의 크고 작은 논쟁에 보절 유림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을 조명했다. 이와 관련, 조헌(趙憲, 1544~1592년)은 소산복을 ‘호남진유(湖南眞儒)’라고 예찬하는 바, 소산복이 지행일치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실천을 강조하는 호남 유학의 특징이 오롯이 드러난다. 이에 대해 매헌 소산복을 위시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 활동에 참여한 전거와 증거를 제시했다. 또, 보절의 유림이 다른 지역의 유림 그리고 한양의 유림과 어떻게 만나고 교류했는지 살피고, 이를 통해 보절이 지방의 궁벽한 향촌이 아니라 중앙과 거의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고장이었음도 밝힌게 성과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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