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임영의 ‘신유일록’, 정읍 입암 네댓 군데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 근현대생활문화보고서 ‘정미소:낟알에서 흰쌀까지’ 발간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1월 07일 14시47분

‘입암산성 성문으로 들어가자 바로 두 개의 큰 못, 사, 오십 호(戶)되는 산촌(山村) 네댓 군데에 물레방아가 있는 것이 영락없는 시골 거리였다'

이 기록은 조선후기 문신 임영(林泳)이 전라도로 내려가며 남긴'창계집(滄溪集)’신유일록(辛酉日錄)'의 일부이다. '일록'은 전라도 정읍 입암(笠巖)에 올라갔을 때의 일을 이처럼 묘사하고 있다. 모두 산행 중에 있었던 일로 여기서는 사찰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물레방아를 산골짜기 마을과 연결 짓는다. 이는 유량과 낙차를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라면 사찰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물레방아가 설치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근현대생활문화보고서 ‘정미소:낟알에서 흰쌀까지’ 를 펴냈다. 전북 관련 내용들을 정리, 소개한다. 편집자

초기의 정미소들은 대규모 곡창지대와 가까운 미곡항을 중심으로 포진했다. 대일수출을 염두에 둔 위치 선정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천과 군산이다. 인천은 여주·이천 평야로 대표되는 경기 일대의 미곡이, 군산은 만경평야로 대표되는 전북의 미곡이 집약되는 곳이었다. 일본인 미곡상은 1890년대부터 내지행상을 통해 산지에서 직접 벼를 확보했고, 이후에는 일본인 지주가 대규모 농장을 꾸려 직접 미곡을 생산했다. 1899년 경인선이, 1912년 군산선이 부설되면서 산지와 미곡항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이 외에도 인근에 조선인 마을이 위치해 있어 정미소에서 일할 대규모 노동력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미곡항이 위치한 지역들은 정미소를 운영하기 위한 조건인 원료, 노동력, 유통환경이 상당 부분 적합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1900년을 전후로 일어난 이 변화는 주로 일본 상인들이 주도하였으나, 이내 조선인 역시 정미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군성(劉君星)으로, 1924년 조선인 최초로 정미기 5대를 설치해 정미소를 창업했다. 이외에도 주명기(朱命基), 이흥선(李興善) 등 다양한 인물이 정미소를 운영해 부를 축적했고, 일본인 정미업자와 경쟁하며 세를 확장해나갔다. 정미업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부를 쌓아올렸으며, 정미업자가 미곡항 내 유력계층이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곡항의 정미업자들이 쉽게 부를 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으로 수출했을 때 수익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었다. 인천과 함께 최대의 미곡항이었던 군산의 경우, 백미로 가공하지 않고 현미 상태로만 수출하는 형태가 지배적이었다. 현미로 수출해야 현지에서 겨와 같은 부산물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나 부산물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 차익만으로도 충분히 이익이 되고도 남았다.

군산이나 목포처럼 미곡항만 위치한 지역은 정미소 수 대비 자본 금액이 매우 큰 데 반해, 대구처럼 대도시만이 위치한 지역은 자본 금액 대비 정미소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따라서 미곡항에는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대형 도정공장이 주로 설치되었고, 대도시에는 미곡상을 겸하는 소규모 정미소가 다수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 기준 전북엔 29개의 정미소(조선총독부 조사)를 갖고 있었다.

'(오수) 동내동내 잇는 예전의 고전풍이 잇는 물방아는 한동안 사람들에게 “총아”로 귀염받어오든 바 이도 때가 잇는지라 오수에 전기가 들어오나니 여기저기 군소 '모다'가와 “발동기” 정미업자가 생기여 낮잠자는 형편인데 그래도 쌀을 앗기고 밥조키는 “물방아쌀”이 조타고 하나 시간과 여러 가지로 편리한 발동기와 (모-타)소로 몰여들어 지금 형편으로는 불면을 휴의 형편이나 오수에2, 3개소 고전풍이 흐르는 “물네방아”는 놀고잇다 한다.

이는 '기계방아로 낮잠 자는 물방아(동아일보 1937년 11월 20일자)'의 기사로, 임실군 오수면의 이야기다. 이미 여러 곳에서 실험한 바와 같이 정미기로 찧은 쌀은 재래 도정도구에 비해 도정률이나 미질이 훨씬 좋다. 그럼에도 이 기사는 “쌀을 아끼고, 밥맛이 좋은 물방아 쌀”이라고 얘기한다. 또 ‘고전풍’이라는 묘사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을 볼 때, 대부분의 쌀은 정미소에서 찧고 있으며 물레방아는 향수를 자극하는 추억 속 물건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정미기의 이점으로 시간과 편리를 꼽고 있는 점이다. 시간은 곡식을 가공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적다는 것이고, 편리하다는 것은 찧는 데 수고로움이 덜 든다는 뜻이다. 연자매라 할지라도 사람이 소나 말을 돌리는 수고, 또 곡식을 섞어주거나 모아주는 등의 일은 필요했다. 반면 정미소는 최초 곡식을 투입하는 일과 가공이 끝난 곡식을 회수하는 일만 하면 되기에 기존 도구에 비해 극단적으로 수고가 적다. 가공에 소요되는 시간도 훨씬 짧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는 정미기들은 초기 미곡항에 들어온 기기와 비교하기 힘든 성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그만큼 시간을 절약하는 것은 비할 데 없는 이점이었다.

심지어 기술적 변화를 제외하면 기존의 방앗간 운영 양상과 큰 차이가 없다점도 정미소가 기존의 재래 도구를 빠르게 밀어낸 이유 중 하나였다. 도시나 미곡항의 경우, 금전을 받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지만 농촌에서는 지역마다 차이는 있어도 현물 삯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금전이 크게 유통되지도 않을뿐더러, 그 해의 수확을 거두기 전까지는 소득이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외부 물품과 교환할 화폐가 필요했던 제주도, 혹은 미곡항과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는 평야 지역처럼 일부 예외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찧은 곡식 중 일부를 삯으로 내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전국을 통틀어 얼마나 많은 정미소가 존재했을까. 1955년 발표된 조사연구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산재한 도정공장의 수는 5,385개소로 집계된다. 우선 이 중 13.7%에 해당하는 743개 공장은 정부양곡도정공장으로 분류된다. 정부양곡도정공장은 정부미만을 위탁·도정하는 장소로, 대량으로 취급되는 정부미의특성상 대규모 설비와 제반 시설을 갖춰야만 했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정미소 중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설립된 대형 도정공장이었다. 이때 전북은 정부양곡도정공장이 48개, 임도정공장이 350개 등 398개의 도정공장을 갖고 있었다.

익산시 춘포면에 소재한 대장도정공장은 호소카와 모리다치[細川護立]가 세웠지만 해방 이후 대한식량공사와 금련 산하에서 정부미도정공장으로 이용됐다.

이런 도정공장들은 보통 불하가 끝나 민간 도정공장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적산물자로 취급됨에도 쉬이 불하하기 어려웠던 일부 공장은 식량공사의 해체 이후 금련(金聯, 대한금융조합연합회) 산하에서 정부양곡도정공장으로 운영되었다. 이곳에서 가공된 정부미는 식량 비축 목적으로 양곡창고에 보관되거나, 군부대에 군량으로 납품되는 등 주로 공적인 목적으로 소비됐다. 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정미소는 임도정공장(賃搗精工場)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찾아온 손님에게 품을 받고[賃] 곡식을 찧어준다는 의미에서 붙은 명칭이다. 품삯은 찧고 난 곡식의 일부를 현물로 떼는 것이 보통이었다. 임도정공장은 1951년의 조사상에는 4,643개소가 확인되었지만, 동네마다 존재하는 방앗간이나 이동방앗간 같은 비정규 정미소까지 포함하면 실제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던 곳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절미정책은 기본적으로 증산 목표 달성을 위한 보조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혼분식 장려운동이나 도정도 제한 등 강력하게 실시된 절미정책에 힘입어 1인당 양곡 소비량은 1971년 224.3kg에서 1976년 203.5kg으로 감소했다. 이 시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쌀의 자급률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 것은 이 때문이었다. 덕분에 1977년에는 쌀 생산 4,000만 석을 돌파하면서 주곡자급 달성을 선언할 수 있었다.

'농협중앙회는 내년도 전국 농협단위조합의 공동이용시설 확층 계획을 마련, 농산물 판매장 1백20개와 도정공장 60개, 농민회관 60동 등 모두 6백개의 공동이용시설을 새로 짓기로 했다. 19일 농협에 의하면 시설의 총 소요자금 중60%는 농협중앙회가 융자하고 10%는 완전 보조, 그리고 나머지 30%는 자체부담키로 했다. 지역별로 확충할 시설 수는 다음과 같다.(단위·개)

▲경기 72 ▲충북 33 ▲충남 98 ▲전북 74 ▲전남 86 ▲경북 74 ▲경남56 ▲강원 78 ▲제주13 ▲부산 4 ▲서울12'(조선일보, 1975년 11월 20일자)

이처럼 급격히 늘어난 농협 소속 도정공장은 기존 정미소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기존에는 개별 정미소가 사실상 독점해왔던 해당 지역의 원료를 농협 소속 도정공장과 나누는 상황이 되었고, 이는 곧 개별 정미소의 소득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농협 도정공장은 대부분 신설되어 최신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정미소가 지난 한 해 8백4개소가 문을 닫거나 전업하는 등 해마다 휴, 폐업 업소가 늘어 도정산업은 이제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벼 생산의 절대 물량에는 큰 변화가 없어 가동 중인 정미소 규모가 점차 대형화 추세로 바뀌며 도정물량을 소화하고 있다. 농림수산부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8백4개 의 정미소가 문을 닫거나 전업, 전국에 걸쳐 총 1만8,012개로 줄어들었다. 현재 정부양곡가공 지정공장은 4백33개, 일반 임도정공장은 1만 7,579개로 지난해 각각 16개, 7백88개씩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정미소가 이처럼 감소하고 있는 것은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의 고도화로 농촌의 재력가들이 정미소, 양조장, 제재소 등에 주로 투자하던 과거와는 달리 투자패턴을 다양화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통수단의 발달로 자연부락단위 또는 2km 이 내에 정미소를 굳이 둘 필요가 없는데 따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도정공장 감소가 특히심한 곳은 서울, 부산 등의 대도시와 인천, 군산, 여수 등의 항구도시 등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매일경제 1988년 9월 2일자 기사)

전국의 가공능력이 양곡 생산량을 초과한 것은 2, 30년 전부터 정부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교통편이나 유통망의 문제가 있었기에 각 지역의 가공수요는 일정 규모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급속도로 진전된 교통망의 발전은 이전까지 양곡가공업계에 묶여있던 제약을 사실상 해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한 농협의 존재 역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고, 각 정미소가 가질 수 있는 파이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하지만 개별 정미소가 가진 유통구조적 한계와 농협의 강세를 더욱 확연하게 만든 쐐기는 추후 다가올 미곡종합처리장의 도입이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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