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고향생각]귀거래사를 가르쳤던 한문선생님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7.06.17 14:29

‘귀거래혜(歸去來兮) 전원장무호불귀(田園將蕪胡不歸) 기자이심위형역(旣自以心爲形役) 해추창이독비(奚??而獨悲)...중략...등동고이서소(登東皐以舒嘯) 임청류이부시(臨淸流而賦詩) 요승화이귀진(聊乘化以歸盡) 낙부천명복해의(樂夫天命復奚疑)’(자, 돌아가자/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고귀한 정신이 육신의 노예가 됐으니/어찌 슬퍼하며 서러워만 할 것인가...중략...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잠시 자연의 조화를 따르다가 마침내 돌아가면 되느니/천명을 즐기면 그만이지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중국의 대표적 시인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다. 도연명은 동진(東晉) 의희(義熙) 원년(405년) 팽택 현령이 된 지 80일 만에 순찰 오는 감독관에 의관을 갖추고 맞이하라는 얘기를 듣고 “오두미(五斗米: 월급을 의미) 때문에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사퇴했다. 그 때 낙향하면서 쓴 글이 귀거래사다.

귀거래사를 거론한 이유는 전주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귀거래사와 고교 시절 이 한시를 가르쳐주신 박시중 한문선생님이기 때문이다. 한문은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고교를 다니던 30여 년 전에도 대입 과목이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에는 대입 본고사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어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는 학생도 많았고 음악 시간에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한문 시간에 국어 공부를 하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바로 박시중 선생님 때문이었다.

박 선생님은 풍모도 호방했지만 생각은 더 크고 깊고 넓은 분이셨다. 무엇보다 고사와 한시를 당대의 영웅과 역사와 연결 지어 설명하시는 것을 듣다보면 어느 새 수업은 끝나있었다.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정석을 꺼낼 수 없을 만큼 한문시간은 대단히 재미있고 즐거웠던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학생들은 박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귀거래사, 송강 정철(鄭澈)의 시가, 소동파(蘇軾)의 적벽구(赤壁賦),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를 외우는 경쟁을 했다. 그 덕에 나도 귀거래사의 앞 몇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박 선생님은 대입 위주의 고교 교육에 동조하지 않고 전인 교육을 혼자라도 실천하기 위해 애쓰셨던 것 같다. 영어나 수학만으로 훌륭한 사람이나 훌륭한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그 분의 가르침은 옳았다.

박 선생님의 뜻을 반추해보면서 요즘 대선주자들까지 나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고교 평준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본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교육부는 고교 평준화를 교육의 정상화로 등식화하면서 고교 입시의 부활에는 단연코 ‘노’라고 말한다. 몇몇 대선주자들은 경쟁력 관점에서 고교 교육을 바라보며 고교 입시나 명문고 부활을 지지하고 있다.

어떤 제도가 바람직한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재의 고교 교육현실이 전인교육이나 교육 정상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고교생은 물론이고 중학생들조차 학교는 그냥 다니는 곳이고 공부하는 곳은 학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들이 내주시는 과제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는 아주 적고 대부분 쓸데없는 부담으로 생각한다. 이런 우울한 사고는 선생님들에까지 스며들어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을 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오래전 지방 명문고가 그 지역의 훌륭한 선생님들을 모아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던 일은 기억조차 희미한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과거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훌륭한 고교만 들어가면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좋은 대학을 가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기회가 상당부분 차단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남 아파트의 강세가 웅변하듯 대학 입시는 경제력의 경쟁으로 바뀌었다. 학교 공부만으로 명문대를 갈 수 없는 현실, 고액 과외가 성행하는 서울 강남의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는 사실, 지방 학생들의 명문대 입학률이 현격하게 떨어졌다는 통계는 ‘고교 평준화=교육 정상화’라는 논리에 동의하기 어렵게 한다.

직접 여쭙지는 않았지만 박시중 선생님이 지금의 고교 교실을 보고 교육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시지 않을 것이다. 귀거래사나 적벽부를 읊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학교, 가난해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명문대를 갈 수 있는 고교, 나만이 아닌 사회나 나라를 생각할 있는 학교는 지금 거의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내 논리만, 내 정책만 옳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영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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