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조경단 비각 재실 도형과 지석

공유

[새전북신문] <온누리> 조경단 비각 재실 도형과 지석



조경단비각재실도형(肇慶壇碑閣齋室圖形)은 1899년(광무 3) 조경단과 주변의 사적을 정비하면서 제작한 채색 그림이다. 1765년(영조 41) 조선 왕조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1771년 전주 경기전 옆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우고 신주를 모셨다. 이후 정조 연간에는 『선원계보기략』에 "문헌이 부족하고 오래되어 시조의 묘소는 기록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고종은 전주 건지산에 이한의 의묘소(疑墓所)를 만들고 그 전면 우측에 정서향으로 조경단을 조성하게 했다.

조경단 옆에 세운 비석은 조선 왕실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을 기록하라는 고종 황제의 명에 따라 성기선 앞에 남아 있는 석재를 사용하여 세워졌다. 비석의 전면에 고종의 어필로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쓰고, 비석의 음기에 조성단의 설치 경위 및 그 연혁을 밝혔다.

화면에는 비각의 후면을 그렸기에 비각의 전면과 비석의 크기를 별지에 그려서 보충했다. 화면 상단의 재실 우측에는 10칸, 전사청은 3칸, 제기고는 2칸, 행랑은 8칸, 담장은 41칸의 규모로 조성되었음을 밝혔다.

대한제국기 고종이 시조에 대한 추숭사업을 추진함으로써 황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세우려 했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지석(誌石)은 돌아가신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 등을 기록하여 무덤 주변에 묻은 것으로 그 재질은 주로 돌(그래서 명칭이 誌石)이지만, 조선시대 지석은 돌뿐 아니라 사기(沙器/砂器≒도자기)나 전석(甎石, ≒구운벽돌) 등도 있다.

조경단(肇慶壇, 전북도지방기념물 3호) 전경 - 영조 때도 조경단 건립이 논의되었으나 정확한 시조묘 위치를 알 수 없어 중단됐다가 1898년 건지산에서 지석이 발견, 고종이 그 자리에 의묘(儀墓)를 만들고 아래 단(壇)을 쌓고 비(碑)를 세웠다고 한다.

지석에 쓰인 글을 지문(誌文, 지석에 쓰인 글)이라 하는데, 돌아가신 분의 인적사항(본관, 이름, 생몰년, 관직(품계) 등)이나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뿐 아니라 조상의 계보, 평생의 행적 등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조경단비각재실도형(肇慶壇碑閣齋室圖形)은 상단 건물이 재실이며, 홍살문에서 우측으로 바라 본 것이 조경단 전경이다.

조경단 지석은 고종 때 건지산 지석이 발견된 곳 아래 단을 쌓아 조경단을 만들었다.

지석은 주로 귀족이나 사대부(양반)의 무덤에서 발견되지만 조선시대 이들의 무덤은 지금도 잘 관리되고 있는 있는 경우가 많아 발견(출토)된 지석의 상당수(300여점)는 고려시대 이전의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후기)에 들어와 비석을 세우는 (양반)집안이 늘어서인지 간단한 인적사항 정도만 기록, 묻은 지석이 많이 발견되며, 19세기 이후 지석에는 지문이 한글자씩인 경우도 있다./이종근(문화교육부장)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