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비너스 가옥(지은이 장마리, 펴낸 곳 실천문학사)'는 일제강점기 유산인 '적산가옥'과 여성 4대 재봉사들의 삶을 형상화한 장편소설이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각광받는 적산가옥 '비너스 가옥'을 둘러싸고, 개발 이권을 노리는 자들의 시류에 올라탄 '적폐 청산'이라는 모함성 구호와 그 집에 켜켜이 쌓인 생의 기록이 충돌한다.
권번의 침선장으로 시작해 재봉소 여교사, 비너스 의상실 디자이너, 그리고 속옷 브랜드 '팬티 인문학'의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침선(針線) 하나로 식민과 전쟁과 산업화의 시간을 건너온 여성 4대의 손끝이 이 집의 진짜 내력을 증언한다.
작가는 적산가옥이라는 무거운 역사적 상징을 다루면서도, 속옷이라는 가장 사적이고 친밀한 사물을 통해 수치심과 욕망, 상처와 존엄의 문제를 끌어안는다. 식민지 시기 한 일본인과 조선 여성들 사이에 얽힌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끝내 품어 안은 가계의 내력이 밝혀지는 과정은 이 소설의 가장 뭉클한 대목이다. 역사의 거대 서사가 지나간 자리에서, 작가는 '거대한 뿌리' 대신 잔뿌리처럼 얽혀 살아낸 사람들의 시간을 길어 올린다.
이 작품은 「팬티 인문학」이라는 속옷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지은이가 살고 있는 익산은 철도로 인해 호남의 관문이지만 산업화는 미미했다. 한때 섬유 산업으로 호황을 누렸던 때도 있었다.
이웃한 군산은 더딘 산업화로 근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히로쓰 가옥’이다. 이 집을 배경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영화 <타짜>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속옷에서 시작한 서사를 근대 문화유산으로 확장, 『비너스 가옥』이 됐다.
전국 곳곳의 근대 문화유산이 관광 자원으로 각광받는 요즘, 적산가옥은 묘한 자리에 놓여 있다. 한편에서는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청산해야 할 식민 잔재라 한다. 『비너스 가옥』은 이 익숙한 이분법 바깥에 선다. 작가는 '보존이냐 청산이냐'를 묻는 대신, 그 집에서 실제로 살고 일하며 버텨온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구체적인 생을 들여다본다.
소설은 침선장 명옥에서 시작해 금자, 미홍, 분홍으로 이어지는 4대 여성의 가계사를 축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백여 년의 시간을 교차 서술한다. 손바느질에서 재봉틀로, 재봉틀에서 속옷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기술의 변화는 곧 여성들이 자기 삶을 꾸려온 방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작가는 속옷이라는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사물을 통해, 몸을 가리는 동시에 드러내는 그 역설적 기능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 '팬티 인문학'이라는 다소 발칙한 제목의 속옷 브랜드는 이 소설이 수치심과 욕망을 다루는 태도를 압축해 보여준다. 감추어야 할 것으로 취급받던 것들을 부끄러움 없이 바라보는 일,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는 존엄의 방식이다.
이 가계사의 뿌리에는 한 소녀의 이름이 있다. 권번 기생의 딸로 태어나 침선장 명옥의 수양딸로 자란 금성. 그는 어린 나이에 집안의 사정으로 일본인 사업가 야마다 다로를 따라 현해탄을 건넌다. 식민지라는 시대가 한 소녀에게 강요한 선택이었다. 고국을 떠난 뒤에도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반세기 넘는 세월을 이국에서 보낸 그녀의 삶,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이가 과연 누구의 핏줄인지는 소설이 끝까지 다 보여주지 않아 그 해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는 이 소설이 '적산가옥'이라는 공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식민지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비너스 가옥을 '적폐'로 몰아 빼앗으려는 이대한이 등장한다.
그는 제 아버지가 과거 옥살이한 것이 침선장 명옥의 모함 때문이라 믿으며, '적폐 청산'이라는 시대의 구호를 집안의 해묵은 원한과 뒤섞어 비너스 가옥을 공격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모함의 실체를 하나하나 걷어내며, 진실은 그가 믿어온 서사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음을 드러낸다.
적산가옥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 역시 가볍지 않다. 근대 문화길 조성과 개발 이권, 그리고 '적폐 청산'이라는 말을 함부로 가져다 쓰는 세력의 움직임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과거사가 얼마나 손쉽게 정치적 수사로 소비되는지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 세태를 날카롭게 포착하면서도, 정작 그 집의 진짜 내력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한 여성이 또 다른 여성을 지키려 했던 선택, 그리고 오래도록 침묵해온 사랑과 속죄에 있었음을 천천히 드러낸다.
전라도 방언이 살아 있는 생생한 대화, 세대를 넘나드는 다층적 구성, 그리고 식민지 시기 실존했던 재봉틀 산업과 권번의 풍속을 꼼꼼히 복원한
디테일은 이 소설을 단순한 가족사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비너스 가옥』은 거대한 역사가 미처 비추지 못한 자리에서, 묵묵히 바늘과 실을 놀려온 이들의 시간에 말을 건넨다. 그 말 건넴이야말로 이 소설이 독자에게 전하는 가장 따뜻한 위로다.
지은이는 부안에서 출생, 원광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하였고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9년 단편소설 「불어라 봄바람」으로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선셋 블루스』, 『존은 제인을 만났지만』이 있고, 장편소설 『블라인드』, 『시베리아의 이방인들』 등이 있다. 불꽃문학상, 이호철통일로문학상 특별상, 여순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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