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체의 대가' 여태명 서예가 별세

김제 다프골든아이상 수상기념 초대 개인전 무산. 연말 발간 예정 '황등면지' 제호, 유작으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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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효봉 여태명 원광대 명예교수가 16일 별세했다. 향년 70세.

그는 1956년 진안 백운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주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원광대 교수로 재임, 서예의 현대적 가치와 진정한 전통의 의미를 평생 탐구해 왔다.

1991년 원광대 미술대학 서예과에 출강한지 30여년이 흘러 2021년 2월 퇴직을 하고 서예가로만 했다.

"직장 퇴직후 고향을 떠나 7~8년 동안 객지에서 생활하고 싶었다. 처음엔 파주를 생각해보았는데 전주의 집과 거리가 멀었고, '한글문화 수도'를 표방한 세종시도 생각했지만 역시 외졌다. 결국 고려 태조 왕건이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의미로 지은 의미에서 유래한, 살기 좋고 교통이 편리한 도시 천안시 동남구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효봉 여태명 서예가는 전주를 떠나 천안에 살 곳을 장만했다. 설상가상으로 3년 4개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이 한국에서 사실상 엔데믹(풍토병화)으로 자리잡을 무렵 갑자기 몸이 아팠다. 3~4년이 그렇게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는 보존 가치가 높이에 2012년 문화재청에서 개인 소장 동산 문화재 실태조사 학술용역 보고서를 만들 정도로 무수히 많은 오래된 책자를 갖고 있다.

보고서엔 소장 문화재 소설 필사본, 가사본, 서간, 동학 관련 판본류 등 수백점이 등록됐다. 녀사서(女四書)·오륜행실도·유씨삼대록 등 희귀자료를 방치해 두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자료나 작품은 정리되는 대로 단계적으로 분야별로 공개했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필요한 연구자나 학자, 학생들이 이용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는 "민체의 필사본을 골동품상에서 처음 본 순간 아! 이거구나. 이게 작품이구나하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필사본은 40여 년간 수집했다. 이제는 많은 사람과 공유할 생각이다. 다른 작가들이 제가 수집한 책을 본다면 해석을 달리 해서 다른 표현 방법을 내 놓을 수가 있다"고 했다.

이어 "모은 자료가 사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요즈음은 골동품상에 가도 필사본이 잘 나오지 않는다. 전주나 서울 등의 고서점에서 필사본이 나오면 이따금씩 전화가 오는데, 제가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을 아니까 값을 꽤 높게 부른다.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모아서 자료화 하겠나 하는 심정으로 사 모으고 있다. 내가 전주에서 태어난 것은 행운이다. 한글 판본 중에 완판본이 많이 남아 있고, 비교적 필사본의 자료도 풍부했다. 한마디로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천안에 새 집을 지어 민체 자료 등을 놓을 공간을 마련, 미술관처럼 짓고 싶지만 아프고 난 후 건강이 최고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사정이 허락한다면 규모를 좀 줄여 쓸 공간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사무실 한쪽엔 폐과된 원광대 서예과의 각종 자료가 널브러져 있다. 워낙 많아 일부만 챙겨올 수 없었던 현실이 개탄스럽다.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 1924~2001) 선생은 1988년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에 서예학과를 처음으로 창설했으며, 한국 서예 발전을 견인한 교육자로도 높게 평가받는다. 이러한 남정의 전무후무한 업적의 영향으로 이후 종합대학 4곳에 서예과가 개설되고, 대학원에 석박사 과정도 개설되면서 서예의 붐이 일었다. 하지만 원광대 서예과가 폐과가 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남정이 뿌리내린 씨에서 돋아난 ‘싹’들은 피어나서 치열하게 살아났고, 여전히 고군분투중이다. 이때 작가는 강사 생활을 하다가 이 학교의 교수가 됐다.

"가을엔 고희전을 가질 생각이다. 항상 ‘마음을 열어라! 스스로 마음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라!"

지난 봄 천안서 만난 기자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다음달 14일 김제서 다프골든아이상 수상기념 초대 개인전을 앞두고 있었다. 연말 발간 예정인 '황등면지' 제호는 유작이 됐다. 채수훈 황등면장은 면지 발간 후에는 '황등면지' 발간 기념 비의 제자도 부탁드리고 직접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시와 한글서예와 그림이 먹과 붓으로 화선지 위에서 만났다. 그림과 시, 서예가 하나로 어우러지자 문인화의 맛이 훨씬 물씬 풍긴다.

시는 수묵채색의 그림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하고, 그림은 시의 감흥을 더 진하게 해 관람객이 한 번 더 시구를 읊조리게 만들었다.

시구를 쓴 그의 독특한 조형성의 글씨는 그림과 시를 한몸이 되게 했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송죽(松竹)과 돌(石이라 .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그는 자연속의 변치 않는 '송죽월(松竹月)'을 통해 윤리를 탐구하고 각각의 덕목으로 인간에게 교훈을 전하기도 했다.

소나무의 불굴함, 대나무의 불욕함, 돌의 불변성이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이게 우리 한민족 그리고 민초들의 DNA가 아닌가.

'글씨같은 그림 그림같은 글씨'를 주제로 돼지, 개, 닭, 원숭이, 호랑이, 뱀 등 12지신과 천지인, 행복, 기쁨, 열정, 소낙비 오는 날 밤에 등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시는 수묵채색의 그림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하고, 그림은 시의 감흥을 더 진하게 해 관람객이 한 번 더 시구를 읊조리게 만들었다.

시구를 쓴 독특한 조형성의 글씨는 그림과 시를 한몸으로 만들었다.

그림과 글씨의 단순한 조화를 넘어 그림이 글씨로 쓰이고 글씨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작품이다.

AI 시대를 맞이해 문자예술의 미래를 모색하는 전시로 과거의 전통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서예가 동시대 시각예술의 중요한 축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엿보였다.

그는 먹과 붓으로 글씨, 그림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화롭게 세상 표현했다.

평생을 한글 민체를 연구하면서 역사적인 배경과 흐름을 정리한 독보적인 학자이며 예술가이다. 서예가로서, 먹과 붓으로 글씨, 그림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화롭게 세상을 그려내는 완성의 경지에 들어선 서화가로 평가받았다.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민체야말로 한글의 생명력과 공동체의 정신을 간직한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글씨와 그림은 그 근본이 같다는 동양 화론의 논쟁을 넘어서, 문자가 회화로, 회화가 문자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예술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우리 한글의 구성 바탕이 天(하늘). 地(땅). 人(사람) 등 세 가지 요소임을 이미 간파한 그는 특유의 상상력과 창작 정신으로 천지인 시리즈를 만들었다.

글씨와 그림은 그 근본이 같다는 옛 화론의 논란을 넘어서 먹과 붓을 사용한 동양문화의 가장 승화된 예술이 글과 그림의 어울림에서 이루어진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림이 글씨와의 단순한 조화가 아닌 그림이 글씨로 쓰이고 글씨가 그림으로 그려진 아우름으로 녹아 내렸다.

작가는 “많은 시간들을 번뇌로 마음을 괴롭히다가 만난 세계가 백성들의 글씨였다”며 “도자에 각인된 한글, 서간에 나타난 그 숨결에는 비록 기교는 없으나 절제된 균형, 자연스러움, 호탕한 기상이 숨어있다”고 했다.

한글체와 한자체를 혼용한 작품들을 비롯, 기호와 부호를 문자로 변환한 실험 작품, 중국 만리장성 전돌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을 했다.

한글에 담긴 무한한 의성과 의태의 장점을 깊숙하게 꿰뚫어 부대끼고 흔들려온 민초의 감성을 작품에 담아냈다. 민체에는 우리들의 삶이 있고, 고통이 있고, 사람이 살아 숨쉬고 있다'어느 꽃잎이 댓잎 만큼 내 가슴을 베인다더냐'

그가 꿈꾸는 예술의 바탕은 고정 관념을 해체하려는 어깃장의 상상력에서 태어났다.

전주대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한국화)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전주, 대구, 서울, 파리, 베를린, 베이징, 상하이, 선양 등 도시에서 27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2.3 내란탄핵 광화문미술행동 깃발행진과 2016년 광화문 촛불 미술행동 캘리퍼포먼스 참여 등 실천하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전라미술상, 동아미술상, 전주시예술상, 한국미술상,자랑스런대한민국시민대상을 수상했다.

유족은 부인 서경주 씨와 아들 강모·혁모 씨, 며느리 이유나 씨, 형제 여태헌 씨다. 빈소는 서울성모장례식장 31호실이다. 발인은 18일 오전 5시였으며, 천안추모공원을 거쳐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 선영에 안장됐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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