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선각자들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다

‘인촌 김성수 선생 탄신 135주년’을 기념 학술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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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굽이마다 시대를 앞서 내다보고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전북의 위대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뼈아픈 수탈과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이들이 남긴 역사적 발자취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 그리고 문화적·경제적 토대의 뿌리가 됐다. 15일 바울센터에서는 ‘인촌 김성수 선생 탄신 135주년’을 기념하여 아주 뜻깊은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대한민국의 탄생, 그 중심에 전북인이 있었다”라는 슬로건 아래 열리는 이번 행사는, 대한민국 건국과 헌정사에서 전북 출신 인물들이 담당했던 주도적 역할과 진취적 시대정신을 다각도로 되짚어보는 자리였다.

이날 기조발제는 이승렬 전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이 ‘애국적 헌법주의와 전북’을 주제로 했다. 애국의 근거를 혈연, 민족, 역사적 공동체보단 민주주의 헌법에 담긴 보편적가치와 원칙에 둬야 한다는 정치철학을 제시했다. 이어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가 ‘신생 대한민국의 산파: 가인 김병로, 근촌 백관수’를, 황호택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은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주역: 인촌 김성수, 수당 김연수’를 주제로 각각 발표한다. 최창묵 얼역사연구소장(대한민국 탄생사 바로알리기포럼 대표)은 ‘한국 의회 민주정치의 전범: 백봉 라용균’을 주제로 발표했다.



△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 ‘신생 대한민국의 산파: 가인 김병로, 근촌 백관수’



대한민국의 출범에는 총칼을 든 혁명가나 노련한 정치가뿐만 아니라, 법과 제도로 국가의 기틀을 만든 탁월한 법률가들이 있었다.

호남의 이웃 고을 순창과 고창에서 태어난 가인(街人) 김병로와 근촌(芹村) 백관수는 신생 공화국이라는 바다에 법치의 닻을 내린 거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구한말 성리학의 태두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글을 읽으며 선비의 결백한 지조와 민족적 자존심을 가슴 깊이 새겼다.

나라를 잃은 뒤 두 청년은 낡은 명분에 머무르지 않고 신학문의 길을 택했다. 일본 메이지대학으로 건너가 서구 근대 법학을 공부하며, 법치주의야말로 식민지 백성을 보호하고 장차 나라를 되찾을 때 문명국가로 도약할 열쇠임을 확신하였다. 전통 성리학의 꼿꼿한 의리론과 서구 근대 입헌주의의 결합은 평생 두 사람의 일생을 이끄는 나침반이었다.

일제강점기 두 사람은 각자의 무대에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가인은 경성에서 무료 인권변론의 길을 열어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의열단 사건 등 민족운동가들이 선 법정을 지켰다. 고문으로 얼룩진 피고인의 상처를 법관의 앞에서 들추어내며 절차적 정의를 따져 묻던 그의 목소리는 식민지 법정을 뒤흔든 의로운 외침이었다.



△ 황호택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주역: 인촌 김성수, 수당 김연수’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는 일제 식민통치라는 암흑기 속에서도 민족 교육, 민족 언론, 민족 기업을 일구어내며 우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한 구국 선각자였다고 평가한다.

이들이 세운 기반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근대 국가로 도약하고 건국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경제적·사회적 초석이 됐다고 강조한다. 형제가 합심, 선친에게 물려받은 유복한 재산을 사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는 '자본의 선용'을 실증했다.

그는 김성수가 일제의 강요와 압제 속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민족 산업과 교육의 보루를 지켜낸 공로(공과 중 '공')에 더욱 중점을 두어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선각자'라고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 이들에게 씌워진 친일반민족행위 논란(매일신보 기고 및 학병 독려 등)과 과오에 대해서도 도망치지 않고 추적했다. 다만, 이들을 당시 조선총독부의 강제적인 대필 압박이나 식민지 기업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시대적 한계와 비극적 상황을 복원하며, 일방적인 폄훼보단 빛과 그림자를 균형 있게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 최창묵 얼역사연구소장의 ‘한국 의회 민주정치의 전범: 백봉 라용균’



라용균이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정읍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역사가 전개되었던 곳이다. 라용균이 태어나기 1년 전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인근 고부에서 일어나 봉건적 신분제도를 무너뜨리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이 탄생할 수 있는 정신적 이념을 제공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2·8 독립선언 참여를 시작으로 상해에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전라도의원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에는 여운형, 김규식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 민족혁명단체 대표회의에 참석, 조선 독립 지원을 호소했다. 어찌 보면 그는 상해 임정의 안창호, 김구, 여운형, 김규식과 같이 활동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일원이었다.

제6회 국회에서 야당 부의장으로 자당의 징계 처분을 받으면서도 여야의 중재자 역할에 충실했으며, 국회 부의장실을 여야 타협의 공간으로 제공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래서 사후 그의 정치 철학과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회에서 ‘백봉 신사상’을 제정, 매년 모범 국회의원에게 수여하고 있다. 국회의원 재직 시 지역구민들과 야당 지도부에게는 인기가 없었지만 근대 의회민주주의를 깊이 이해하고 실천한 의회 전범의 모범 국회의원으로, 전북을 대표하는 독립투사요 건국을 주도하고 의회를 발전시킨 근현대 정치인으로 기억되어야 할 터이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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