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가을이 깊어가는 10월은 한 해 동안 흘린 땀과 정성이 풍성한 결실로 돌아오는 계절이다. 황금빛 들녘에서는 농부들이 정성껏 가꾼 벼를 거두고, 마을 어귀의 감나무에는 탐스러운 감들이 붉게 익어간다. 자연의 풍요로움이 절정에 이르는 이맘때면 어린 시절 농촌에서 마주했던 가을걷이의 정겨운 풍경이 새삼 떠오른다.
벼를 수확한 논 한가운데에 볏단 세 묶음을 서로 기대어 세워두던 풍경도 떠오른다. 볏단을 세워두는 것은 수확한 벼를 햇볕과 바람에 말리고 보관하기 위한 농사일이었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생명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들새들이 날아와 볏단에 남아 있는 낟알을 쪼아 먹는 모습이었다. 겨울이 다가와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계절에도 새들은 그곳에서 작은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의 수확이 끝난 자리에서 다른 생명들이 먹이를 얻는 그 풍경은 어린 마음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도 감나무에는 자연과 생명을 배려하는 선조들의 지혜가 남아 있다. 감을 수확하면서 높은 가지 끝에 몇 알을 남겨두는 ‘까치밥’의 풍습이다.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겨울철, 까치를 비롯한 들새들이 찾아와 허기를 달랠 수 있도록 열매를 남겨두는 것이다. 자연이 베푼 결실을 모두 인간의 몫으로 거두지 않고 다른 생명과 나누는 마음, 그 소박한 풍습 속에 생명을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까치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에 친숙하게 자리해 온 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석탈해 신화에도 등장하며, 민간에서는 반가운 손님과 기쁜 소식을 전하는 길조(吉鳥)로 여겨졌다. 「은혜 갚은 까치」 설화에서는 자신을 구해준 인간에게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처럼 까치는 단순한 새를 넘어 길상(吉祥)과 보은(報恩)의 의미를 지닌 한국문화의 상징적 존재로 이어져 왔다.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린 민화 ‘작호도(鵲虎圖)’는 선조들의 독특한 문화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산중의 맹수로서 두려움의 대상이면서도 재앙과 잡귀를 물리치는 수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호랑이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커다란 호랑이는 위엄 있는 맹수의 모습과 달리 어수룩하고 우스꽝스럽게 표현되고, 작은 까치는 나뭇가지에 앉아 호랑이를 당당하게 마주한다. 이러한 대비에는 해학과 풍자, 권위에 대한 서민들의 비판적 시선까지 담겨 있다. 선조들의 상상력은 위엄과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친근한 모습으로 바꾸고,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작은 까치에게 당당한 모습을 부여하고 있다.
전통문화는 과거의 유산으로 머물지 않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창조되며 세계와 소통하는 살아 있는 문화적 자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전통문화의 상징이 현대의 K-문화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호랑이 ‘더피’와 까치 ‘서씨’는 한국의 까치호랑이 민화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캐릭터다. 익살스럽고 어수룩한 호랑이와 영리하고 재치 있는 까치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로 그려졌다. 현대적 영상기술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문화와 언어의 경계를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재탄생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 전통문화가 지닌 살아 있는 신화적 상상력과 창조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세월 축적된 설화와 민화,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독창적인 문화적 감성은 현대의 예술적 상상력과 만나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이다.
한국문화의 진정한 가치는 세계적인 인기나 문화산업의 성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정신문화의 깊은 뿌리에는 인간과 자연을 함께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생명을 존중하고 은혜를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상생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선조들의 삶과 지혜 속에서 형성되고 전승되어 온 것이다. 까치밥에 담긴 작은 생명에 대한 배려에서부터 까치와 호랑이를 소재로 한 민화의 해학과 풍부한 문화적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화의 깊이와 생명력은 이러한 전통의 지혜와 생명존중, 상생의 가치에서 찾을 수 있다.
/박광수(원광대학교 명예교수·K-전통문화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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