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청년 세대의 술자리는 과거와 다르다. 대학가와 회식 자리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집단 의식을 다지던 낯익음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저도주, 제로 슈거 소수(소주), 하이볼, 논알코올 음료다.
단순한 ‘건강’ 트렌드가 아니다. 소비심리학과 사회학 측면에서 보면, 청년 세대의 달라진 음주 행태는 이 세대에서 두드러지는 ‘실용적 개인주의’ 정서와 일치한다. 그러니 일상 속 술자리가 어떻게 청년의 가치관을 대변하는지, 우리 사회는 이들의 새로운 담론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그 추이가 궁금하다.
청년들에게 폭음과 숙취는 치명적인 손실이다. 숙취는 내일의 루틴과 일상의 효율을 망친다. 그래서 통제력을 잃지 않는 절주나 제로 슈거, 저도주를 선호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현대 사회를 불확실한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국가나 사회 안전망이 ‘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시대다. 청년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한다. 몸, 건강, 자산, 시간을 지키는 자기관리에 몰입한다.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는 심리는 합리적 방어 기제이자 책임감의 발로다.
상명하복식 회식 문화는 해체되었다. 잔 권하기도 마찬가지다. 청년 세대는 내 돈과 내 시간을 들여 내가 원하는 술을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했듯, 현대 청년의 핵심 정서는 ‘능력주의’와 ‘사적 자율성’이다. 집단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에 주저 없이 ‘다름’을 선언한다.
이런 탈집단주의는 ‘거대 담론’이나 ‘무조건적인 희생’에 대한 ‘결별’로 이어진다. 노력하고 지불한 만큼만 대가를 받는 기회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취하기만 하고 맛은 없는 술이 외면받듯, 일상에 ‘편익’이 없는 관행들은 퇴조 중이다. 그들은 가성비와 가심비를 우선하는 ‘행동적 실용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는 ‘단잠을 깨우는 소음’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청년 세대의 이러한 ‘실용적 개인주의’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답은 그들의 잔 속에 담겨 있다.
청년들은 지나간 것들로 가득한 잔을 비우고 싶어 한다. 조직이나 사회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회식 자리를 기성 문화와 동일시한다. 이를 철없는 이기주의로 보기는 어렵다. “이 사회의 룰과 제도가 나에게 어떤 효용과 보탬을 주는가”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이다. ‘대치’를 걷어내고 ‘소통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든 잔이 보인다.
그 잔은 ‘개인의 기회와 자율성’이 가득한 잔이다.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선심성 정책이나 일방적 보호가 아니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공정한 마당, 그리고 스스로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제도의 완충력이다. 기업의 보상 체계부터 국가의 사회 안전망까지, 마음껏 도전을 돕고 실패를 위로해 주는 ‘품 넓은 사회’, 그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그렇다면 ‘실용성’을 넘어 ‘넓은 연대’를 그들의 잔에 채울 수 있을까. 그들이 기꺼이 책임지고 참여할 만한 ‘체험형 의제’ 발굴이 필요하다. 그들은 투입 대비 산출을 셈한다. 이 생존 에너지가 좁은 틀에 갇히지 않게 하려면, 사회 연대를 통한 개인적 효용을 탐하도록 역동적인 판을 짜야 한다. 취업, 주거, 노동, 분배 등 손에 잡히는 공정성을 그들의 힘으로 쇄신할 때, 실용적 참여는 비로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동력으로 분출될 수 있다. 그 분출이야말로 미래의 불안을 ‘창발적 연대의 힘’으로 전화하는 에너지다. 그들은 이 에너지를 이끄는 주체이고 주인공이다.
그래야만 청년들의 ‘재귀적 창발’이 꽃필 수 있다. 금세기 ‘멸종’으로 상징되는 ‘위기의 강’을 ‘연대의 다리’로 만들 수 있다. 그들은 사회가 더 투명하고 실용적으로 바뀌길 원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반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한다. 생존을 위한 적응과 진화의 산물로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대전환기에 당과 알코올을 빼낸 그들의 합주는 시대적 필연이다. 서로 맞들어야 한다. 그들이 건넨 ‘실용’의 잔이 마르기 전에. /로컬칼럼니스트 신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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