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어기야 어기야 저어가니 원포귀범이 이 아니냐 수벽사면 양안태 불승청원각비래라 날아오는 저 기러기 갈대를 입에다 물고 일점 이점 떨어지니 평사낙안이 이 아니냐'
지난 28일, 화순 제11경 환산정에서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이난초 명창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환산정은 1637년 무렵, 백천 류함(百泉 柳涵, 1576~1661) 선생이 창건했다. 고상하게 따오거나 풍류의 멋을 갖춘 이름이 아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 있다’ 고 해서 환산정(環山亭)이다. 고을 이름 또한 환산동이었다. 운둔처사, 담박한 학인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선생은 고고한 선비정신이 깃든 이곳에서 나라의 위기 앞에서 의(義)를 생각하고, 세상의 명예보다 선비의 지조를 지키며 살다 갔다.
그의 우국충절과 고고한 선비정신이 서려 있는 환산정에서 이명창의 깊고 힘찬 '흥보가'가 산수와 정자를 타고 울려 퍼졌다.
댕기들인 쪽진 머리에 곱디 고운 옥비녀와 비취색 치마로 단장한 이명창은 1980년대 남원 국악 상징 고 강도근(1918~1996)명창(국가무형문화유산)에게 소리를 배우고 이어받아 적통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됐다.
이 명창은 강직한 동편제 소리꾼인 강명창에게서 ‘흥부가’를 비롯, ‘수궁가’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배워 익혔다.
이후엔 성우향 명창에게서 김세종제 ‘춘향가’를 익혔고, 안숙선 명창에게서 강산제 ‘심청가’를 배웠다. 동편제의 서슬과 보성소리의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두 계통 소리의 장점을 온전히 계승한 명창으로 성장했다.
이명창은 1992년 남원 춘향제 판소리명창 경연대회(대한민국 춘향국악대전)에서 명창부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그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흥부가’ ‘수궁가’ ‘춘향가’ ‘심청가’를 완창했다.
그는 동편제 소리를 정통으로 계승해 안정적으로 창법을 구사, 남원을 기반으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등 전승 의지와 기반이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나브로, 환산정의 고요한 물빛과 그늘진 나무, 오래된 기와 지붕이 '재깍재깍' 흐르는 시간을 오늘까지 조용히 이어준다.
이명창은 환산정에 올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면서 “화순에 이렇게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줄 몰랐다”며 감탄했다.
환산정은 병자호란 이후 류함 선생이 은거하면서 세운 누정의 역사, 저수지와 산자락이 만드는 수상 경관, 노송과 기와 지붕이 어우러진 고요한 분위기가 한곳에 모여 화순 역사문화 여행과 남도 정자 여행의 깊이를 보여준다.
멀리서 먼저 봐야 제맛이 살아나는 누정이다. 화려한 관광 시설은 아니지만, 물과 산, 정자가 함께 놓인 장면만으로도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류함 선생은 인조의 강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1637년엔 의병들과 전주에서 숙식을 한 그였다. 그래서 단순한 풍경 명소가 아닌, 시대의 아픔과 선비의 절개가 풍경 안에 남아 있다.
서성저수지 물빛 위에 자리한 환산정은 물가의 나무와 누정, 산자락이 함께 보일 때 수상 비경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위치다. 정자가 산속 깊은 곳에 홀로 들어앉은 것이 아니라, 저수지 물길과 맞닿은 작은 땅 위에 놓여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누정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나무와 석축, 기와 지붕이 물가의 고요함 속에 천천히 드러난다. 환산정의 풍경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진다. 맑은 낮에는 산과 물의 윤곽이 선명하고,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는 수면 위 빛이 부드러워지며 분위기가 한층 깊어진다. 물안개가 피는 계절엔 저수지와 정자가 함께 흐려지며 더욱 더 신비로운 장면을 만든다.
이명창은 정자 위에서 '흥보가'를 열창하면서 "이곳에서는 소리가 아름답게 절로 나오는 것 같다”며 이곳의 풍광과 소리의 어울림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산과 물, 그리고 한 선비의 굳은 뜻을 품은 정자. 소리는 시간을 넘어 정신을 전하고, 환산정은 그 정신을 오늘에 다시 일깨웠다.
산수는 환산정을 품고, 환산정은 백천의 충절을 품고, 그 충절은 이명창의 한(恨)을 품은 소리를 통해 다시금 살아났다.
'선비의 지조의 종착역' 환산정에서 류함 선생의 고고한 선비정신과 이명창의 아름다운 우리 소리가 그렇게 만났다. 이 특별한 울림은 환산정의 역사와 류함 선생의 선비 정신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중한 영상과 기록으로 남을 터이다.
이번 만남은 국가유산청의 영상 촬영으로 진행됐다./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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