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현재 국내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 논란은 단순히 군대를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더욱 근본적인 질문은 대한민국이 강대국의 압력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국민의 양심과 헌법, 국제평화의 원칙에 따라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주권국가로 설 것인가이다.
지난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와 미국의 역봉쇄가 이어졌고, 6월에는 잠정적 합의가 도출됐지만 상호 공격과 휴전 위반 논란 속에 다시 충돌이 격화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의 파병이 자유항행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군사력의 추가 투입이 새로운 보복과 대결을 부르고, 한국의 선박과 국민마저 분쟁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일 위험을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종교학자의 시선에서 전쟁은 단순한 군사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을 훼손하고, 타자를 적으로 고정하며, 공포와 증오를 재생산하는 폭력의 문명적 구조이다. 세계의 여러 종교는 교리와 역사적 전통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생명의 존엄, 정의와 평화, 사랑과 자비라는 공통의 윤리적 지평을 끊임없이 실천해 왔다. 물론 종교 역시 국가권력과 결합해 전쟁을 정당화한 역사에 대해 깊이 참회해야 한다. 종교의 역할은 폭력을 신성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권력을 비판하고, 모든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보편윤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평화주권은 어느 강대국의 전쟁에도 자동적으로 종속되지 않은 채, 우리의 헌법과 국민적 합의에 따라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권리이자 책임이다. 우리의 평화주권이란 미국과 거리를 두자는 뜻도, 동맹을 부정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동맹은 주권을 양도하는 계약이 아니라 서로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공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약속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 파병 반대와 국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이미 종교·노동·여성·법조·시민사회 등 601개 단체가 파병 반대를 요구하고, 전국 곳곳에서 시민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국회 역시 헌법이 부여한 국군 해외파병 동의권에 따라 현 단계의 호르무즈 파병에 반대한다는 정치적 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러한 시민의 목소리와 국회의 파병 반대 결의는 정부의 외교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재명 정부가 미국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압력에 맞서 “대한민국 국민과 국회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민주적 정당성이자 협상력이다.
물론 그 선택에는 현실적 비용이 따를 수 있다. 파병을 거부할 경우 미국의 경제·통상·안보 압박이 더 거세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평화주권은 구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치적 자율성은 경제적 회복력과 자립 역량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힘을 얻는다. 동시에 비파병이 국제적 책임의 회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은 유엔을 중심으로 정전과 평화협정, 항행안전, 인도주의 지원, 기뢰 제거와 선원 구조 등 평화를 회복하고 지키기 위한 국제공조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번 호르무즈 사태에서 명분 없는 전쟁에 실익 없는 파병을 요구받는 지금이 정치·경제·문화·군사 전반에 새롭게 조여오는 종속의 고리를 끊을 기회다. 이는 대한민국이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종속을 넘어서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강대국의 문화적·정신적 종속에서도 벗어나, 국민의 생명과 국익, 그리고 세계평화를 지킬 수 있는 진정한 문화강국의 길을 가야 한다.
평화문명은 단지 전쟁이 없는 소극적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타자를 적으로만 규정하지 않고, 갈등을 폭력이 아닌 대화와 제도로 해결하며, 국가의 힘을 생명과 평화를 위해 사용하는 문명이다. 호르무즈 파병을 거부하는 정치적 결단은 그러한 평화문명을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의 양심, 국회의 민주적 결정, 유엔헌장의 평화원칙을 토대로 전쟁과 평화에 관한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평화주권이다. 오늘 대한민국이 세계 시민에게 보여줄 성숙한 문화강국의 모습은 그 평화주권 위에서 전쟁과 종속의 질서를 넘어 생명을 존중하는 평화문명을 이루는 것이다./박광수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 K-전통문화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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