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충의공 최경회(忠毅公 崔慶會, 1532~1593) 등 그 많던 무장현감의 비석은 어디로 사라졌나.
'제2012년도 제1호 전라북도지정문화재 실측조사보고서 무장객사'(2012)와 , ' 상하면지'(2009) 를 보면서 이같은 궁금증이 생겼다.
두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선조 12년(1579) 3월 최경회 현감이 부임하여, 신사년(1581) 6월 영암군수로 승진하여 떠났으며, 공적비가 세워졌다”
이는 당시 최경회 선생이 무장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고을을 다스린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읍민들이 공적비, 즉 선정비를 세웠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선정비는 어느 시기에 훼손되었는지, 또 어떠한 연유로 사라졌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최경회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일휴당선생실기(日休堂先生實記, 최익수가 1861년 발행했다고 함)'엔 '무장 읍민 입비(立碑)'로 기록됐다.
또,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해주최씨 종원 최수현씨가 무장면사무소 주변에서 그의 비를 보았다고 증언한다. 다른 것은 기억이 안나고 '경(慶)'자 만은 분명히 보았고, 30여 기의 비석을 보았다고 했다. 최경회 현감 비는 안쪽에서 2~3번째에 서있었다고 증언했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최경회 선생이 생전에 백성을 다스렸던 흔적이자, 당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공적비가 관리의 소홀 속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참으로 가슴이 아리다.
선생은 일찍이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재임하며 백성을 살피고 고을을 다스렸다. 기록에 따르면 옥구현감, 장수현감, 무장현감, 영암군수, 영해부사, 담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무장현감(1571년) 출신 유한량과 함께 진주성 혈전에서 순절한 최경회 의병장도 무장현감(1579년) 출신이다. 곤궁한 처지의 자신을 살려준 남편에게 의리를 지키려고, 진주성 의암에서 왜장을 익사시킨 주논개 의부인(義夫人)의 부군이 바로 최경회다.
화순출신 최경회 장수현감은 곤궁에 처한 양반출신 주논개 모녀의 목숨을 구해주고 사노비형태로 부양한다. 이후 무장현감으로 부임시에도 모녀를 데리고 왔다.
죽을 고비에 있던 주논개 모녀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살려낸 무장현감 출신 최경회 의병장은 공심을 지닌 목민관이었다. 그렇다면 선생이 이들 고을의 목민관으로 재임할 때 백성들이 세웠던 선정비와 송덕비의 흔적을 찾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단순히 옛 비석 하나를 되찾는 일이 아닐 터이다.
그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한 목민관의 삶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며, 조선시대 지방 행정과 목민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역사교육의 장을 마련하는 일이리라.
현재 무장객사엔 오섬, 임득열, 최효건, 이수현, 정준일, 정권, 유진오, 이교인, 황정연, 이찬하, 이희하, 이창익 등 12명의 무장현감 공적비를 비롯 17기의 비석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유한의사추모비는 정시해 등 4명의 추모비, 동치오년병인오월일은 환곡 폐단 개정 조목을 정해 놓은 비, 어사심공상학만세불망비, 김상공운시은불망비, 전참판김영곤불망비가 있다.
안타깝게도 최경회를 비롯, 김욱, 유인량, 이태연, 김왕, 신후명, 심남, 안세징, 최원, 한배하, 권이진, 김유희, 조연창, 조기영, 윤영신, 홍순향, 홍종관, 이희익, 이중익, 조명호, 신좌익 등 무장현감을 지낸 21명의 공적비가 사라졌다는 '무장현 관아와 읍성 종합정비계획(고창군, 2009, p 108~113)'이란 보고서가 보인다.
아마도 이들 공적비는 아주 오래 전에 사라졌을 공산이 크며, 일부 있는 것은 무장객사로 옮겨 차례대로가 아닌 무순으로 정리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류정훈 화순향교 청년유도회장은 "최경회 선생은 임진왜란의 영웅이기에 앞서 백성을 보살피는 목민관이었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충신이었다"고 했다.
이어 "그러므로 선생의 선정비를 찾아 복원하는 일은 단순한 기념사업이 아니라, 목민정신과 충의정신을 함께 계승하는 역사문화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최경회 선생의 선정비와 송덕비가 확인되는 곳마다 관련 기록과 유물을 찾아 그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고, 가능하다면 복원하여 화순 충의사 경내에 세워 후대에 길이 보존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자라나는 학생들이 그 비석 앞에 서서 “한 사람의 목민관이 백성을 어떻게 섬겼는가.” “그리고 그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해 애쓴 목민관의 은혜를 어떻게 기억하였는가”를 배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매우 뜻깊은 교육의 장이 될 것이란다.
그는 "비석 하나를 다시 세우는 것은 돌 하나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그 시대 백성들의 마음과 한 목민관의 정신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고 덧붙였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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