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네팔 히말라야 산악지구에 대규모 홍수와 산사태로 발생한 비극적 상황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화면 속 네팔은 한순간에 거대한 폐허로 변했다. 무너진 빌딩과 터전을 잃은 이들의 통곡, 흙더미 속에서 가족을 찾아 헤매는 손길들이 화면을 메웠다. 실종자만 이미 5천명을 넘겼다 하고 이들 중에는 일하기 위해 간 한국인들도 있다.
자연이 만든 거대한 재난으로 우리 자신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참상을 마주할 때면, 우리네 인간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가 지구라는 작은 별에서 생존하고 있는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얼마나 오만하게 자연을 대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자연의 분노는 우리가 자초한 일이라는 자괴감과 더불어…
장례식장에 앉아있노라면,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경이로울 때가 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졌던 사랑과 기쁨, 꿈, 그리움, 좌절과 서러움, 때로는 수모, 고통, 질투 등이 삶의 구석구석에 아로새겨져 있으리라. 하물며 매몰된 수천 명의 꿈과 사랑을 상상해보면 전인류적 비극이 전하는 허무함과 슬픔은 차마 상상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오랜만에 가족 친척이 모여 한해 수확을 즐기며 조상님들의 음덕에 감사드리는 중추절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살아 있다고 대단하게 뻐길 일도 아니고, 죽은 자라고 모두 슬픈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조차도 어쩌면 ‘아파트’나 ‘주식’이라는 뻔하고도 익숙한 단어들로 어김없이 채워질지 모른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듣다 듣다 ‘자식 아파트 가격은 자제하기로 하자’라는 제안을 했다. 젊은 적엔 자식 키 크는 게 자랑이더니, 중년에는 얼마나 공부를 잘하고 어느 대학에 진학했는지가 자랑거리였다. 이제 노년이 되자 자식 아파트 가격이 눈 뜨면 올라 있다는 사실이 자랑거리가 될 만큼 우리가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없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언제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때가 올까, 아니, 오기는 할 건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우리들의 죽음을 어떻게 슬기롭게 맞을 것인가, 나는 이웃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에 관한 명상보다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물욕에 대한 사람들의 미련이 자꾸 날 슬프게 한다. 언젠가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이야기를 건넸다. “너희들, 그거 전혀 몰랐지? 내가 너희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사실 모악산이 내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어.”
완주와 전주의 경계에 의연하게 서 있는 저 거대한 산이 내 소유일 리 만무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생각해봤다. 설령 법원 등기부등본에 내 이름이 한 줄 적혀 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왜 사람들은 모를까. 내일이라도 그 산을 팔아서 맛있는 음식을 사 먹거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 산이 제아무리 비싸져도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 산은 나와 더불어 소멸된다는 것을.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가끔 내 산, 모악을 가보면 진정한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매일같이 새벽안개 헤치며 그 산의 흙을 밟고, 거친 숨을 내쉬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껴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그 산의 진짜 주인이다. 진정한 소유란 가방에 욱여넣거나 서류에 박제해 두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경험하고 누리는 것으로부터 온다.
이제 수확의 계절 가을이 온다. 아파트 평수와 등기를 위해 바친 내 청춘에게 이제 작게나마 속죄해야 할 때다. 등기부등본의 이름 뒤에 가려져 진짜 누려야 할 삶의 행복을 유기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네팔의 비극을 돌아보며 우리네 삶의 덧없음을 깨닫고, 다가올 우리들의 죽음을 기쁘게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이 수확의 계절에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전주세계소리축제 집행위원장, 전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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