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사유의 한국사-이이(지은이 이상익, 펴낸 곳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는 그를 성리학자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자, 문학과 사상, 정치와 현실을 함께 고민한 통유(通儒)로 보게 한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흔히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성리학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다. 열아홉 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고, 노자의 『도덕경』을 산삭하여 『순언』을 편찬했으며, <화석정>과 <고산구곡가>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
16세기 후반 조선은 훈구와 권간의 폐정이 누적되고 제도는 시대 변화를 따르지 못했으며,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공론마저 무력화되던 시기였다. 이이는 이를 단순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창업과 수성의 시기가 지난 ‘경장(更張)의 시대’로 진단하고, 법과 제도를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할 과제로 이해했다.
이이는 흔히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성리학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다. 열아홉 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고, 노자의 『도덕경』을 산삭하여 『순언』을 편찬했으며, <화석정>과 <고산구곡가>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면모는 그를 성리학자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자, 문학과 사상, 정치와 현실을 함께 고민한 통유(通儒)로 보게 한다. 16세기 후반 조선은 훈구와 권간의 폐정이 누적되고 제도는 시대 변화를 따르지 못했으며,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공론마저 무력화되던 시기였다. 이이는 이를 단순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창업과 수성의 시기가 지난 ‘경장(更張)의 시대’로 진단하고, 법과 제도를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할 과제로 이해했다.
이이의 학문은 세계와 인간의 원리를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문제로 나아갔다. 그는 이(理)와 기(氣)가 서로 떨어질 수도, 뒤섞일 수도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보고, 이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탐구는 그 자체로 완결되는 이론이 아니었다. 이를 ‘인심에 말미암고 천리에 근본한다[因人心 本天理]’는 명제로 현실 정치에 적용하여, 정책의 도덕적 정당성과 실현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군주와 신하를 정치의 두 주체로 인식하여 기강과 공론을 국가 운영의 기둥으로 삼았고, 동서분당의 갈등 속에서는 어느 한쪽만을 옳다고 하지 않고 양쪽을 조정하려 하였다. 수기(修己)와 안민(安民)은 그에게 결코 분리된 과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구상은 법제 개혁으로 이어지면서, 국가가 어떤 원리 위에서 운영되어야 백성의 삶이 실질적으로 나아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됐다.
이이가 생전에 제시한 개혁안은 당대에는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그 절실함이 뒤늦게 확인되었고, 그의 경세론과 개혁사상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조선 후기 국정개혁론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동서분당을 조정하려던 그의 구상은 훗날 탕평책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성리학은 기호학파의 중심 이론으로 계승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 전개의 토대가 되었다.
이 모든 논의를 관통하는 것은 실심(實心)·실공(實功)·실효(實效)로 요약되는 무실(務實)의 정신, 곧 진실한 마음으로 실제에 힘써 실질적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태도였다. 아울러 이이는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대에도 이른바 ‘이단’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그 안에서 취할 것을 찾으려 했다. 이이를 다시 읽는 일은 그를 한 사람의 성리학자로 이해하는 시각을 넘어, 학문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경장의 시대에 던져졌던 이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로 남아 있다.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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