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어농삼락 ⑱ 진안고원길 걷기
한때 도보여행자들의 필독서로 꼽혔던 ‘나는 걷는다’라는 책이 있다. 프랑스 기자 출신의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20여 년 전 쓴 책으로 전 세계에 걷기 열풍을 일으킨 실크로드 기행서이다. ‘르 피가로’지 등 기자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던 유력 언론인이 60세에 은퇴한 후 삶의 절망적 고비를 걸으면서 이겨내고 그 경험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아내와 사별한 그는 지독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마르코폴로의 여정을 따라 답사하며 제2의 인생을 개척했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3권짜리로 번역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자연의 풍경을 벗 삼아 걷기는 단순한 장소의 이동을 넘어서 사유와 성찰의 장이자 병들고 지친 몸을 치유하는 훌륭한 자연병원이라는 걸 확신했다.
일평생 걷는 여행을 좋아했던 장자크 루소(1712~1778)는 자서전에서 걷기를 “자기 삶의 모두이자 본질”이라며 “걷기에는 내 생각을 활기차고 생기 넘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생태주의 운동가이며 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도 걷기가 ‘땅과 자연, 생명체’가 어우러지는 조화와 질서를 체험하는 경험이자 사유의 깊이를 키우는 수단‘이라고 단언했다.
그동안 집 주변 위주로 걸었던 내가 ‘멀리 함께 걷기’를 시작했다. 비영리민간단체인 ‘하늘땅 진안고원길’이 주최하는 ‘바람 이는 고원길에 서다’는 프로그램으로 15개 구간 총 210㎞를 걷는 장정이다. 1억년의 신비를 간직한 마이산 두 봉우리를 비롯, 금강과 섬진강을 이루는 멋진 물길과 계곡, 운일암 반일암의 기암절벽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코스로 이루어졌다.
진안고원은 진안군·무주군·장수군에 걸쳐있는 해발고도 300~500m로 한반도 남쪽의 유일한 고원지대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오지의 대명사였던 이 일대는 고지대 산골마을의 독특한 풍광이 살아있는 지역이다. 워낙 추위가 혹독하고 산이 많다보니 뭇사람들의 발길이 뜸했고, 덕분에 때 묻지 않은 걷기 좋은 길로 남았다.
8월 29일 다녀온 하반기 첫 코스인 14구간(14㎞)은 진안만남쉼터에서 출발해 우화정-운산인공습지-진안천변-도치재-중기마을회관-상전면사무소에 이른다. 이날 행사에는 폭우가 예보됐음에도 160여명이 참여했다. 참여자들은 진안 거주자만이 아니라 전주와 익산, 대전 등 꽤나 먼 곳에도 원정을 왔고, 연령대도 초등학생부터 70대 이상까지 다양했다.
금강 상류인 진안천을 따라 습지와 논이 보인다 싶더니 하도치 마을을 지나면서는 산길과 깊은 숲길로 이어진다. 인적을 찾기 힘든 이곳에서는 하릴없이 집을 지키던 개들만이 무리지어 나타난 낯선 이들의 발길에 여기저기서 컹컹댈 뿐이다. 인적이 드문 산길, 숲길 곳곳에 길을 안내하는 리본과 표지판이 세심하게 걸려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더욱 놀라운 건 구석구석 모든 길의 잡초들을 모두 깎아놓을 정도로 관리를 완벽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최측은 1년에 6번 씩 예초기를 들고 다니면서 길을 정비한다고 했다.
내가 특별히 진안고원길에 대해 관심을 가진 건 젊은 시절 아버지와 각별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진안군내 10개 면을 연결하는 도로를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진안 전매서 임시직원으로 담배를 배달하기 위해 수없이 걸었던 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진안읍에서 소달구지에 담배를 싣고 매일매일 평균 30~40㎞정도를 다녔다. 틈틈이 쉴 때나 집에 돌아와서는 소 여물을 챙기고, 소발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는 쇠짚신을 삼아야 했다. 뙤약볕이 쪼이는 한여름이나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묵묵히 걸어야 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달리 생각하면 구순을 앞두고도 건강을 유지하는 건 이때 많이 걸었던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길을 걸으며 이런 저런 사색이 빠지다 보니 어느 새 점심 먹는 장소인 중기마을에 도착했다.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폭우로 변했다. 마을회관과 정자 등에서 비를 피하며 모여 앉아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다. 주최측은 이날 김치콩나물국 한 그릇씩을 나눠주었고 식후에는 달콤한 매실차도 아낌없이 베풀었다. 앞서 휴식시간에는 블루베리 효소를 넣은 막걸리도 한잔 마실 수 있었다. 지역 업체나 개인이 자발적으로 후원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은 참가비가 없고, 길을 완주한 목적지에서 출발지까지 버스로 태워다준다는 것이다. 또 진안만남쉼터까지만 가면 거기서 카풀을 통해 출발지로 이동할 수 있다.
20년 전 이 행사를 기획한 정병귀(52) 사무국장은 현재 연간 방문객 6만명이 넘는 대표적 걷기로 키운 주인공이다. 경희대 지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2006년 시민단체 ‘서울 생명의숲’에서 활동하다 마을문화조사차 진안에 왔다가 진안고원의 매력에 빠져 아예 눌러앉아 진안사람이 됐다. 그는 2009년 주민들과 함께 걸었던 ‘진안 마실길’을 시작한 후 걷기 열풍이 불던 2011년부터 진안고원길이라는 둘도 없는 훌륭한 브랜드를 붙였다.
2023년 KBS 영상앨범 ‘산’에 소개되기도 했던 진안고원길은 15개 코스가 각각의 특색이 있지만 그 중에 9구간 ‘운일암 반일암 숲길’(8.8㎞), 7구간 ‘황금폭포길’(17.8㎞), 1구간 ‘마이산길’ (12.9㎞)등이 명소로 꼽힌다. 특히 주천면 삼거리에서 주천면사무소에 이르는 9구간은 운일암반일암 숲길을 따라 걷는 짧은 코스로 전망대와 무지개다리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천변데크길이 그림 같다.
산이 깊고 골이 긴 곳이기에 난을 피하거나 새 세상을 꿈꾸려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던 이 땅은 피와 눈물과 한이 서린 생생한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9월 5일 걸었던 13구간(천반산길)은 조선시대 중기 정여립(1546~1589)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다가 역도로 몰려 비극적 최후를 맞았던 곳이다. 제법 넉넉한 물결이 바위산을 돌아 굽이치는 금강 상류를 따라 가다보면 정여립이 옷을 걸어 두었다는 의암바위가 있다. 천반산 고개인 먹재를 넘는 이 구간은 좁은 산길을 따라 급경사를 오르내리는 험한 코스이지만 사방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금세 땀을 식혀주는 멋진 구간이기도 하다.
또한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에는 전봉준의 장녀인 전옥례 여사의 묘소와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6구간(전주가는 길)에는 임진왜란과 동학혁명 당시 대규모 전투가 치러졌던 웅치도 볼 수 있다.
이 단체 1~3대 대표를 지낸 김명순(72) 씨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고원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올해로 17년이 됐다”면서 “지금은 완쾌돼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또 5년 전 암 수술을 받았다는 50대 여성 참가자는 “제주 올레길을 비롯해 곳곳을 다녀봤는데 진안고원길은 고원지대의 아기자기한 풍경과 시원한 날씨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나와 함께 천반산 정상인 깃대봉(647m)를 다녀오는 체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재현 대표는 “진안고원길은 마이산 운장산 천반산을 비롯, 용담호, 금강과 섬진강을 이루는 맑은 천이 품은 속살을 잘 볼 수 있는 길로서 국내 어떤 곳보다도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소개했다.
걷기는 단조롭고 지루한 무한의 반복이다. 하지만 진안고원길에서는 그럴 틈이 없다. 고원마을 100개, 고원고개 50개에서 만나는 논길, 밭길, 숲길, 물길, 신작로와 옛길 등 주변 배경이 수시로 바뀌어 나타나니 진행속도가 빠른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계절따라 지형따라 변신하는 자연의 얼굴을 만나면서 발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진안고원길이다. 최진환(객원 논설위원)
지루할 틈 없는 산골 풍경 ‘자연 드라마’
15개 구간 210㎞… 연간 6만명 찾는 성찰·치유의 길 정여립의 흔적·전봉준 후손 마을 등 생생한 역사 숨결 60년 전 아버지가 생계 위해 하루 40㎞ 걷던 길 ‘각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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