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고구마 꽃이 피었습니까?

공유
기사 대표 이미지

[새전북신문] 해학(海鶴) 이기 선생 고택 활용사업에 참가한 이들과 함께 고구마 캐기 체험에 나섰다. 밭 한쪽에서는 마을 이장님이 미리 걷어놓은 이랑을 파헤치며 알이 굵은 고구마를 캐내느라 분주했고, 또 다른 밭고랑에서는 여성 참가자들이 고구마 줄기를 다듬기 시작했다.



고구마 뿌리가 남은 자리를 중심으로 호미로 붉은 황토를 조심스럽게 파헤치자 주먹만 한 크기, 어떤 것은 메주만큼 커다란 고구마가 그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낼 때마다 밭 여기저기서 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풍요로운 수확의 기쁨으로 온 밭이 시끌벅적해지던 바로 그때였다.



"고구마 꽃이 피었습니다!“



고구마 줄기를 따던 한 여성 참가자가 고구마 넝쿨을 높이 쳐들면서 외쳤다. 그 외침을 듣는 순간, 1995년에 제작되었던 정지영 감독의 영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박정희 정권 시절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하다 의문의 죽임을 당했던 천재 과학자 이휘소 박사, 그러나 그가 남겼던 데이터와 자료를 바탕으로 남북의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자주국방의 결실을 이루어냈던 판타지적 영화였다.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강력한 경고와 함께 민족의 의지를 드러냈던 그 통쾌했던 작전명이 바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였다.



기사 이미지


“고구마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생경한 외침에 필자는 그 여성 쪽으로 달려갔다. 나의 눈앞에 연분홍의 고운 자태로 활짝 핀 고구마꽃은 우리에게 영화 속의 ‘무궁화꽃’ 못지않은 큰 기쁨을 안기고 있었다. 제법 나이 든 필자 역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고구마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어릴 적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고구마를 심기도 하고, 캐기도 하면서 자랐지만, 고구마 넝쿨에 꽃이 피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마는 씨앗이나 뿌리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씨고구마를 이론 봄에 심어 싹을 틔워 키운 다음, 그 줄기를 잘라 심으면 스스로 뿌리를 내려 자라는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고 있었던 고구마가 꽃을 피웠으니 놀라우면서도 반가운 일이 아닌가. 그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옛날에도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게 꽃을 피워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어쩌다 고구마밭에 이런 꽃이 피면 마을 전체의 화젯거리가 되었으며, 100년에 한 번 핀다고 하는 전설 속 ‘우담바라(優曇波羅)’를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집안이나 나라에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징조라고 여기며 좋아했다고 하였다.



고구마를 캐던 사람들은 모두 일손을 멈추고 놀라고 신기한 듯 고구마꽃 주위로 몰려들어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구마 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두 송이의 꽃은 언뜻 보면 나팔꽃 같기도 하고 무궁화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여성은 이 신비로운 꽃을 손자들에게 보여주겠다며 조심스럽게 채취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어버려서 원래의 어여쁜 모양을 잃어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날 오후 내내 고구마 꽃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신비로운 잔상을 남겼다.



필자 역시 그런 마음으로 오후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왔지만, 저녁에 그 신비로움 뒤에 숨겨진 생태적 진실을 알게 되면서 필자의 마음은 이내 묵직해지고 말았다.



이 고구마는 조선 영조 39년(1763년)에 일본에 갔던 조엄(趙嚴)이 대마도에서 들여온 작물이다. 본래 아열대 기후가 원산지인 고구마가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자라나기까지에는 상당한 적응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온 다습한 원산지에서는 흔히 꽃을 피우겠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 조건에는 쉽게 꽃을 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 고온 다습한 날씨가 이어질 때 어쩌다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 신비감에 놀라면서 상서로운 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전국 각지의 고구마밭에서 이 고구마꽃이 자주 눈에 띄면서 이것이 기사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처럼 뜨겁게 변해버렸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말았다.



옛 어른들이 고구마 꽃을 보고 ‘100년 만의 행운’이라는 믿음은 이제 우리에게는 더는 받아들일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고구마 꽃은 '행운의 전령'이 아니라, 지구가 조용히 보내오는 '소리 없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이 고구마 꽃은 우리 땅이 기후변화와 이상기온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작은 꽃 한 송이가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최근 이상기온으로 네팔에서는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거센 홍수가 덮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앞에 온 인류가 망연자실하였다.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탐욕에 눈이 멀어 초래한 재앙들이 어찌 네팔만의 일이겠는가.



흙먼지 묻은 손에 쥐어졌던 연보랏빛 고구마 꽃을 다시 떠올려 본다. 어여쁜 모습을 보고서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그 꽃은,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을 향해 지구가 울리는 절박한 경종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오랫동안 아려왔다.

/송일섭(염우구박인문학교실 운영자)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