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전, ‘향토색’을 말하다

김미선의 다시 찾은 전북 미술<3> 조선의 풍경을 바라본 일본인과 전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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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1922년 시작된 ‘조선미전’은 조선의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발표의 장이었지만,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미술을 일정한 기준에서 규정하는 제도가 되기도 했다. 특히 심사와 평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시대적 용어가 ‘조선향토색’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향토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규정한 사람들이 일본인 심사위원과 평론가들로서, 그들은 조선미전 미술가들이 조선의 풍경과 사람을 그리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표현을 ‘조선적’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과연 조선인이 스스로 발견한 조선의 모습과 같았을까.

먼저 제1회 조선미전에서 3등상을 수상한 가토 다쿠지(加藤卓爾)의 아이를 업은 아낙과 초가집의 조선 풍경은 다음 해 전주에서 입선한 오쿠다 료타로우(奧田良太郎) 등으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조선의 풍경은 서양미술의 풍경화라기보다는 조선의 산천과 농촌, 한복을 입은 인물, 전통적인 생활 모습 등의 ‘조선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심사와 평론을 통해 향토색이라는 미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인에게 식민지 조선은 ‘본토’와 구별되는 이국적이고 전-근대적인 원초적 풍경으로 재현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의 산과 들, 초가와 농촌, 전통 복식과 생활풍속은 그러한 시선을 만족시키는 소재였다. 결국 ‘조선적이다’라는 판단은 조선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이자, 일본인이 조선을 바라보고 분류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조선미전의 모든 작품을 식민지 정책의 산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조선의 화가들은 제한된 제도 안에서도 자신들이 경험한 조선의 풍경과 고향의 기억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어떤 작가에게 농촌 풍경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로서, 다른 작가는 고향의 서정과 자연에 대한 감정으로 표현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인이 규정한 조선과 조선의 화가들이 경험한 조선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미전의 ‘향토색’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조한백(趙漢栢)과 같은 전북의 서양화가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차이가 더욱 선명해진다. 당시 전북에서는 아이를 업은 아낙과 초가집의 조선향토색은 유행하지 않았고, 그들의 일상과 농촌 풍경은 반드시 식민지적 의미의 ‘향토색’을 보여주기 위한 소재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장소이자 기억의 공간이고, 근대적 서양화의 언어로 자신들의 지역을 새롭게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오늘 우리가 조선미전의 전북작품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김미선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강의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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